[출간 전 연재]구원의 미술관#.⑧_삶과 죽음의 톱니바퀴

#. 최종화
삶과 죽음의 톱니바퀴

 

이제 『구원의 미술관』의 출간 전 연재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책이 출간되었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미술사에서 가장 분분한 해석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1>을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시대의 우울과 그럼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들. 어떤 이야기인지, 지금부터 확인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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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살아간다
뒤러의 <멜랑콜리아1>에 부쳐
 
이 책에서는 시대와 지역이 다른 다양한 아티스트의 그림이나 조각, 도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시 처음에 던졌던 질문,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에 관해 생각해보겠습니다.여기에서도 앞에서 언급한 적 있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이 그 실마리를 제공해줍니다. 그 이름은 <멜랑콜리아 1>. 뒤러의 판화 중에서도 특별히 인상 깊은 작품으로 동판화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가로 19센티미터, 세로 24센티미터 정도의, 주간지보다 작은 작품이지만 생생하게 약동하는 것이 마치 동영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훌륭한 그림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비록 정물을 그렸다고 해도 뛰어난 그림에는 화면이 지금이라도 움직일 듯한 임장감臨場感이 있습니다. <멜랑콜리아 1>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러한 움직임을 동판화로 표현한 것이니 뒤러의 천부적인 재능은 찬탄할 만합니다.

​하지만 저는 작품의 정밀함이나 완성도에만 끌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작품이 표현하려는 것이 강한 자력磁力으로 저를 끌어들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작품의 타이틀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멜랑콜리아’. 라틴어 본래의 뜻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일상적으로 ‘멜랑콜리’, 즉 ‘우울’이라는 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멜랑콜리’가 ‘우리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를 고민하는 데 힌트가 될까요. 이것은 ‘우울’이라는 것이 개인의 감정을 높이 평가하는 근대라는 시대의 특유한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멜랑콜리’는 하나의 기분, 감정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삶에서 깊은 슬픔이나 상실감에 괴로워할 때 그리고 그 울적한 와중에도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서 바라보게 되면서 경험하는 감정이자 기분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멜랑콜리’에는 의미가 있으며, 이것이 드디어 하나의 스타일, 아름다움, 게다가 비범함이라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뒤러가 자기 작품에 ‘멜랑콜리아’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바로 ‘우울’이 고통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하나의 비범한 스타일, 혹은 ‘감수성의 시대’를 알리는 특별한 감정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근대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의 가치가 강조되는 가운데, 지적인 활동을 포함하여 노동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향이 지속되어 왔습니다. 정보화가 진전하여 복잡하고 고도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이 요구되는 현대에도 노동이 인간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사회에서는 ‘다혈질’의 활동적인 성격의 사람을 중요시하는 것이겠지요. 뒤러 시대에도 분명 그러했을 것입니다. 혹은 그가 살던 시대에 바로 그런 경향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렇기 때문에 뒤러는 굳이 환영받지 못하는 ‘멜랑콜리’를 주제로 삼았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진짜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요? 또 그것이 불안이나 슬픔, 공허함이나 상실감에 빠진 채 ‘지금 우리들이 어디에 있는지’ 스스로가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고 난감해 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먼저 <멜랑콜리아1>을 보고 느낀 점은 마치 수수께끼처럼 그 작품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극도로 정밀하게 그려진 하나하나의 물건이나 인물, 동물이 왜 있는지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화면 오른쪽의 건설 중인 듯한 건물 벽에는 종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에는 가로, 세로, 대각선의 합이 모두 34가 되는 4차 마방진, 즉 유피테르 마방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옆에는 모래시계가, 또 그 옆 벽에는 천칭이 매달려 있습니다.

​건물 앞 석단에는 커다란 날개가 달린 여인이 주먹을 쥔 왼손으로 턱을 괴고, 오른손으로는 컴퍼스를 쥔 채 먼 곳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얼굴은 검은 담즙이 많은 탓인지 거무스름하여 우울해 보이는데 눈만은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겠어, 나는 이럴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는 듯 찬찬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날개를 가진 여성의 긴 드레스 허리 벨트에는 열쇠가 매달려 있고, 입을 조이는 끈이 풀린 지갑이 발치까지 내려와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닥에는 톱, 못, 장도리, 잉크병, 망치 같은 목공 도구가 널려 있고 거기에 공 모양의 둥그런 것이 굴러다니고, 그 옆에는 비쩍 마른 개가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습니다. 그 옆으로 바퀴 같은 커다란 숫돌 위에 앉은 작은 천사는 두꺼운 판인지 수첩인지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무언가를 일사불란하게 쓰고 있습니다.

​이 작은 천사의 눈앞에 있는 기묘한 다면체의 표면에는 해골 같은 것이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깥 풍경으로 눈을 돌리면, 대홍수의 쓰나미 뒤에 찾아온 죽음의 적막함을 떠올리게 하는 듯,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고 하늘에는 토성으로 여겨지는 혹성이 빛나고 있습니다. 그 후광을 받으며 박쥐가 ‘MELENCOLIA 1’이라 쓰인 커다란 날개를 펼치고 입을 벌린 채 날고 있습니다.

​다양한 물건이나 인물, 동물 등 수많은 소재로 뒤덮여 있고, 그 하나하나는 신의 솜씨라고 할 만큼 섬세한 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윤곽이 분명하게 그려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전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망연자실할 지경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잡다하게 펼쳐진 듯 보이는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드러납니다. 그것들은 우리들의 생활을 활성화하는 동시에 죽음을 증식하는 데 쓰이는 기예나 과학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지요.

​삶과 죽음이라는 것이 마치 한 기계에 달린 두 개의 톱니바퀴처럼 회전하여 우리들의 인생은 한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래시계가 암시하는 것처럼 죽음은 하나의 기억상실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것도 완결되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나는 이 세상에서는 아무도 만족스럽게 그 삶의 끝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일까. 누구나 그렇게 자문할 것입니다. ‘멜랑콜리’가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에 있는 거야. 여기에서 살고 여기에서 창조할 수밖에 없는 거야.’ 날개 달린 여성의 반짝이는 눈은 그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여인은 뒤러 자신의 우의적인 자화상이 분명합니다.

​<멜랑콜리아1>로부터 약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으로 번뇌하는 사람들에게 뒤러의 그림은 하나의 ‘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다시금 뒤러와 같은 우울한 상념에 잠길 수밖에 없다 해도 ‘멜랑콜리’는 ‘기분 좋은 슬픔’의 원천이 되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는’ 조용한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미의 진실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으로 마음에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셨으면 합니다.









(출간 전 연재 종료)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