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이야기] 흉노 유목제국사

대학 1학년 때 정재훈 교수님의 ‘동서 문명 교류사’라는 수업을 들었다. 내 막연한 짐작과는 다르게 유목민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수업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을 세워 동서를 연결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사’를 연 사람들로서 유목민을 바라보는 내용이었다. 중고등학교 국사, 세계사 수업에서는 접하지 못한 낯선 관점이었다. ‘아, 이런 역사가 있었네. 이렇게 보면 역사가 또 다르게 읽히는구나.’ 눈이 크게 떠지고 생각이 넓게 열리는 수업이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그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처음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일상생활로 돌아오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한동안 수업 교재로 제시된 역사책들을 읽는 것이 힘이 들었다. 책을 펼치면 ‘이거 다 죽은 사람들 이야기구나’로 시작해 죽음에 관한 여러 생각과 이미지들이 떠올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이 너무나 강렬한 생각이어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 수업을 들으며 그런 상태에서 조금씩 빠져나올 수 있었다. 역사 이야기가 주는 기나긴 연결의 감각, 아주 오래전 유라시아 어느 초원에서 일어난 일들이 세계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감각이 묘한 위안을 주었다.

나만 아는 이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정재훈 교수님 책은 늘 좋은 마음으로 하게 된다. 이번 책은 흉노 유목제국사. 국내 연구자가 처음으로 완성한 흉노 유목제국 통사이고, 무엇보다 문헌 연구자로서의 관점을 분명히 한 책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다음의 일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PC교정을 막 끝내고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어 교수님께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전체적으로 흉노가 한과 대결하며 성장하거나 위축되는 과정을 중심으로 서술하셨는데요, 여기에 흉노 자체의 문화나 습속을 보여주는 내용이 더해지기는 어려울까요? 흉노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남겼는지 유물 자료 등을 통해 설명하면 좀 더 충실한 유목제국사가 될 것 같아서요.”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교수님이 바로 전화를 하셨다. 내가 혹시 무슨 말실수라도 한 걸까 걱정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교수님은 “제가 이 책을 왜 썼느냐면요” 하면서 이 작업을 시작한 속내를 전해주셨다.

최근의 흉노사 연구는 100년에 걸쳐 축적된 고고학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한 연구가 주를 이루는데, 문헌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사료가 너무 소홀히 여겨지는 것 같다고, 그 때문에 학회 때마다 고고학자들과 엄청 ‘싸운다’고 하셨다. 발굴 자료와 문헌 자료의 간극을 설명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사료를 좀 더 엄밀히 새롭게 해석해보고자 이 책을 계획하셨다는 이야기였다. 마침 그때 나는 『단단한 고고학』의 OK교를 보고 있기도 해서 머릿속에 ‘역사학자 VS 고고학자’의 그림을 그리며, 그럼 그 부분을 좀 더 본격적으로 드러내자고(글로 싸워보자고) 다소 짓궂은 투로 말씀드렸다. 그러나 교수님은 지도에 표시된 점 하나, 화살표 하나로도 어떤 입장인지가 다 드러나는 것이라며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하셨다. 이날의 대화로 나는 이 책의 저술 의도를 분명히 알게 되었고, 이후로는 『사기』 『한서』 『후한서』 등의 인용이 정확히 되었는지, 한자가 잘못 들어간 곳은 없는지, 시기적으로 상호 모순되지는 않는지 등을 꼼꼼히 확인하는 쪽으로 교정 방향을 잡았다.

 

『사기』 「흉노열전」, 『한서』 「흉노전」 같은 책을 한참 검색하고 있으면 ‘아... 이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꾸는 데 무슨 도움이 되나’ 같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곤 한다. 특히나 요즘처럼 한국 사회는 이제 더 나아지기 어려운 게 아닐까라는 절망감이 짙어질 때는 기원전 2세기에 흉노와 한이 끝도 없이 전쟁한 과정을 오류 없이 복원하는 일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회의가 찾아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오래전 강의실에서 느꼈던 연결의 감각을 되살려보려 했다. 과거의 일들을 해석하는 오늘의 관점이 우리가 이웃 국가나 우리 사회, 동료 시민을 바라보고 관계 맺는 데도 작용한다는 것을 기억하려 했다(책에도 흉노사의 복원이 여러 나라가 얽힌 국제적, 정치적인 문제임이 언급되어 있다). 지금의 나는 역사 독자라고 하기도 어렵고, 역사 편집자라고는 더더욱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런 책을 기꺼이 만들 수 있는 건 그런 감각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나의 성향이나 내가 가진 자원, 경험이 두루 쓰일 수 있어서 다행인 작업이었다.

끝으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 모든 책이 다 그렇지만, 이 책은 특히나 디자이너가 고생을 많이 했다. 엄청난 양의 한자와 각주, 지도와 도판, 계보도를 비롯해 자잘한 요소들이 가득가득 들어찬 책이라 각 요소 간의 위계와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는 게 중요했는데 그걸 다 해냈다. 무엇보다도 저자와 편집자가 손으로 삐뚤빼뚤 그려놓은 화살표와 애매하게 찍은 점, 범례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엉성한 지도를 깔끔하게 정리해준 마법의 손! 작업 후반부에는 정말로 의지가 많이 되었다. 그래서 마감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디자이너께 밥을 사는 일. 텍스트에만 눈이 가기 쉬운 편집자에게 지도와 도표에 능한 디자이너의 존재는 너무나 소중하다.

_ 편집자 이진

#흉노유목제국사 #정재훈

#돌궐유목제국사 #위구르유목제국사 #고대유목제국사_3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