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 이제, 내 아이에게 자신 있게 권한다 - 『파브르 식물 이야기』

‘곤충 이야기’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파브르의 작품으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은 단연‘식물 이야기’이다. ‘식물 이야기’도‘곤충 이야기’처럼 책상머리에 앉아 연구한 결과가 아니라 몸소 식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완성한 글이다.
파브르는 사람살이와 별 관련 없는 희랍어의 어미 변화를 배우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식물 이야기』를 썼다. 그래서 아이에 대한 아비의 살가운 사랑이 가득 담겨 있고, 식물 관찰 과정을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아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식물 관찰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식물 이야기』는 사람살이의 지혜, 혹은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지혜가 가득 담긴 훌륭한 걸작이다. 그러나 나는 여태 내 아이에게 이 책을 권하지 못했다. 이 아름다운 책을 쓰기 위해 파브르가 관찰한 식물들이 우리 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식물이라는 게 머뭇거린 유일한 까닭이다.
서점에 흔하디 흔하게 흩어져 있는 식물 관련 책을 보라.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라며, 미국 레드우드 숲의 자이언트 세쿼이아를 이야기하고, 세상에서 가장 큰 꽃이라며 라플레시아 꽃을 이야기한다. 심지어 우리 국민의 약 70퍼센트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꼽는 소나무 이야기를 일쑤 빠뜨리기까지 한다.
대책 없이 외국 책을 베껴 놓은 책을 아이에게 보여 줄 이유를 나는 찾을 수 없었다. 퀴즈 놀이를 하기 위해 사람살이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상식을 쌓는 데에 내 아이를 동참시킬 수 없어서였다. 이것은 자녀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쉽게 쓴 파브르의 아름다운 책『식물 이야기』를 아직 나의 아이에게 권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래서 식물살이를 통해 사람살이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게 인도하는『파브르 식물 이야기』에 등장하는 식물을 우리 곁에서도 찾아보고 파브르처럼 같이 관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사계절출판사에서 출간한『파브르 식물 이야기』를 만난 건 그래서 내게는 분명 행운이다. 나보다는 내 아이에게 더할 나위 없는 큰 행운이겠다. 사계절출판사에서 펴낸『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파브르가 식물을 관찰했던 과정을 읽어가면서 우리 아이들도 직접 주위의 식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일테면 파브르가 이야기한, 세상에서 가장 큰 나무인 세쿼이아 나무를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동시에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큰 나무 가운데 하나로 용문사 은행나무를 보여준다. 물론 파브르가 언급한 모든 식물을 우리 식물로 대치할 수야 없지만, 가능하면 우리
식물의 비중을 늘리려 노력한 점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맙다. 심지어는 파브르가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같은 특징을 가진 식물이 있다면 과감하게 우리 식물로 대치했다.
토끼풀, 큰개불알풀, 작살나무, 국수나무, 배롱나무, 닭의장풀, 얼레지, 상수리나무 등 우리와 친숙한 식물들이 의뭉스럽게 자리잡고 앉아 있는 건 쉽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편집부는 능수능란하게 이 책의 곳곳에 이것들을 끼워 넣었다. 마치 파브르가 자신
의 책에 그렇게 해 놓은 것처럼 말이다. 훌륭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파브르는 아이들에게 관찰 과정을 아주 자세하게 보여 주면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상세히 설명했다. 또 아이들이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와 연관시키면서 삶의 지혜를 풀어냈다. 그래서 이 책의 첫 장인‘히드라 이야기’에서도 파브르는 사실‘헤라클레스 이야기’부터 시작했다.(현재 사계절출판사에서 출간한『파브르 식물 이야기』에는 빠져 있다.) 그러한 방식이 식물과 동물, 나아가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효과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또 살아 있는 히드라를 둘로 자르는‘만행’을 저지를 때에는 그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바로 이 같은 파브르의 철학과 설명 방식은 이 책을 백년 가까이 걸작으로 남게 한 결정적인 이유이다.
하지만 어린이를 위해 새롭게 구성한 사계절출판사의『파브르 식물 이야기』에는 이같은 파브르 특유의 철학과 자세한 묘사가 상당 부분 빠져 있다. 아이들이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그림을 많이 삽입하기 위한 편집부의 의도였겠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도 끝내 아쉬움을 버릴 수는 없었다. 사계절출판사의『파브르 식물 이야기』는 기존의 식물과 관련한 엉터리 정보로 가득한 책들의 부족한 점을 메울 수 있는 좋은 책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크다.
그래도 나는 이만큼 좋은 책을 곁에 놓을 수 있는 게 고마워서 뒷표지에 새겨진 안내글까지 남김없이 새겨 읽은 오늘 밤, 지금 잠든 아이의 머리맡에 이 책을 가만히 놓을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을 보고 기뻐할 아이만큼 나도 기쁜 마음으로 내일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고규홍│신문, 잡지, 디지털 미디어 등 다양한 매체에 나무와 식물에 관한 칼럼과 포토에세이를 쓰면서, 이 땅의 나무 이야기를 더 많이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화성 전곡리 물푸레나무 등 버려지다시피 했던 여러 나무를 찾아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게 만들기도 했다. 작품으로는『이 땅의 큰 나무』,『절집 나무』,『 알면서도 모르는 나무 이야기』,『 옛집의 향기, 나무』,『 나무가 말하였네』, 나무사진집『동행』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