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



안녕하세요, 사계절출판사입니다.

제1회 박지리문학상 심사평을 올립니다.

총 215편 응모에 구병모, 이기호, 정소현 작가님이 예심과 본심을 맡아주셨습니다.

각 심사위원이 신인 작가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애정 가득한 심사평입니다. 세 분 각자가 예심과 본심에서 눈여겨본 작품들에 대해 진심 어린 조언들을 담아주셨습니다. 심사위원들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오래전 예능인데, <나는 가수다>의 사회자는 “다음 노래를 듣고 싶은 가수를 뽑아주세요” 했다. 지금 이 노래를 잘한 가수는 말할 것도 없고―양쪽 모두 잘했으니까―다음 노래도 궁금해지는 가수를. 공모전에 입고된 소설들을 검토하는 마음도 그렇지 않을까. 지금 보이는 숙성도와 노련미에 못지않게 다음번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를 찾는 마음. 야속할 정도로 짧은 생에 다양한 세계관과 강력한 내러티브로 무장한 작품들을 남긴 박지리 작가를 기리면서, 이후로도 본 공모전이 이어져 새로운 작가들의 발굴 통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그러느라 예심에서 많은 후보작들을 손에 쥐고 망설였고, 아쉬운 대로 본심에서 인연을 맺지 못한 분들을 간략히 호명하고 싶다.

 

<너의 실종>외 1편. ‘외 1편’의 제목은 여기 쓰지 않는다. 제목이 주된 소재이자 주제이며 스포일러가 되기에 아이디어 보호 차원에서다. 발상은 좋은데 그것을 펼쳐낼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문장 표현력이 미숙하다. 핵심 아이디어와 킬링 포인트 이외의 부분은 초보 단계로, 사람은 복잡다단한 존재인데 인물들의 사고 구조와 표현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소재를 구하는 눈이 있으니 언어를 갈고 닦는 과정이 남았다.

<아이>는 문장이 준수하고 폭풍같이 몰아치는 문제의식이 두드러졌다. 강력한 어젠다가 폭발하는 아드레날린처럼 분출되는데, 소설의 핵심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통해 줄줄 풀어내어 설명과 주장 일변도로 목적지에 도달하려는 약점을 보였다. 분노와 위악을 조금만 절제해도 이보다 세련된 작품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는 남자>는 구조적 완결성과 문장의 세공에서 오랜 수련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여성의 외모와 행동에 대한 묘사를 비롯하여 ‘몫 없는 자들’을 묘사하는 방식이 과거 숱한 남성 중심 한국문학에서 답습한 패턴을 거의 그대로 구현하고 있었다. 현재의 한국문학에 이와 같은 소설을 한 편 더 얹어놓으려면 그 기시감을 상쇄할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했다.

 

본심에서는 다음의 응모작들을 유심히 보았다.

 

<굴토끼와 붉은 여왕의 상관관계> 외 1편. 전체적으로 베일에 싸인 듯한 모호함 속에 긴장감을 조성하는 연출과 진술이 돋보였다. 그렇게 일구어진 분위기가 결말에서는 약간 바람 빠진 풍선이 됐다.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감춘 듯한 분위기는 형성했는데 정작 독자는 그 비밀에 다가가고자 하는 동력-매혹이 생기지 않고 수동적인 입장에 놓인다. 애초에 작품의 목적이 비밀 해소나 문제 해결에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둘러싼 매혹의 요소를 만드는 작업이 앞으로의 과제일 것 같았다.

<네가 그래서 그랬잖아>는 각종 범죄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조사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경찰 캐릭터의 설정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미해결 살인 사건을 다룬 범죄소설로서 고식적이고 전형적인 설정과 배경을 구성하여 희생자와 주변인들을 그 설정에 끼워 맞추는 바람에 인물들이 평면적인 패턴으로 수렴되는 한편, 과거 수십 번쯤 본 듯한 충무로의 범죄 미스터리 서스펜스를 반복하는 느낌을 주었다.

<그들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차분하고 단정하며 안정적인 문장과 서사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을 주요 모티프로 삼았고, 작가의 주석을 보기도 전에 그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너무 명확했다는 점이, 그 목적이 비록 애도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걸렸다. 현대 사회에 필요한 이야기로 읽혔으나 고인의 비극이 단지 모티프로만 소비되지 않았나 싶은 지점이 있었고, 이는 창작자의 최소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이는 실존 인물이 어떤 삶을 살다 갔는지, 그 인물이 어떻게 해석되고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 또는 그들을 둘러싼 관계와 환경에 따라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될 것이며,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삼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기 바란다.

<안의 세계> 외 1편. 이 작품은 이미 거의 완성형에 가까워 보였다. 작가가 얼핏 무심한 듯이 던져놓은 비현실적인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개성적인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화가 시너지를 일으켰고, 소재를 다루는 태도는 우아했으며 전개 방식과 문장들은 세련되었다. 나로서는 결점을 찾기 어려운 수작들이었고, 역량이 뛰어난 만큼 어디서든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종 당선작으로 결정된 <단명소녀 투쟁기>는 몽환과 비현실의 세계에 단도직입으로 다가서는 천연덕스러움이 돋보였다. 특이하게도 초반이 아니라 중반에 독자들을 약간 고뇌에 빠뜨릴 만한 진입장벽이 있는데, 읽는 이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키거나 부드럽게 설득하기보다는 그들 앞에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투신하기로 택한 작가의 도전정신이 빛났다. 중반의 각종 무리수에도 불구하고 끌릴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전하며, 앞으로도 전투적인 상상력과 혁명적인 전개로 독자를 놀라게 해주기를 기대해본다. - 구병모(소설가)




 

‘박지리’라는 이름을 듣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또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은 채 바로 심사를 수락했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작가이지만, 내게 ‘박지리’는 언젠가 만나야 할, 또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라도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응모작들을 읽었다.

 

  본심에 올리진 못했지만, 예심에서 눈여겨본 작품들은 <자경>과 <절대 지각하지 않는 메추리의 아주 평범한 출근> 그리고 <파이의 탄생>이었다.

  <자경>은 고전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작품이었다. 쌍둥이 남매인 이선과 이형의 이야기가 경상북도 안동을 배경으로 미세한 파열선을 그으면서 교차하는 소설이었다. 묘사와 서술을 오가는 솜씨도 안정적이었고, 감정선을 따라 변화하는 대화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보는 이치’처럼 너무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문장들이 마음을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말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소설의 플롯일지도 모른다. 조금 더 작가의 목소리가 아닌, 인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소설 속 지진마저도 작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절대 지각하지 않는 메추리의 아주 평범한 출근>은 일종의 노동소설이었다. 12년째 계약직 사무 보조원 이해원의 이야기. 회사 내 다양한 갈등이 구체적이고 현실감 있는 묘사로 이어지는 소설이었다. 그러면서도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변사처럼 유쾌한 톤을 유지하는 것 역시 이 소설의 미덕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마주한 마지막 반전에선 마음이 뭉클하게 변해버리기까지 했다. 아, 이 작가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법을 잘 알고 있구나, 감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반전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반전 뒤에 부연처럼 붙은 해원의 마음은 급하고 감상적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회사 밖 해원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진 소설이었다.

  <파이의 탄생>은 이제 막 주민등록 발급 신청서가 나온 열일곱 살 재희와 은규의 이야기였다. 뜻하지 않게 비밀을 공유하게 된 두 친구가 어떻게 질문을 감내하고 비밀의 세계로 나아가는지, 밀도 높은 구성으로 밀고 나가는 소설이었다. 아쉬운 것은 이런 점이었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점점 재희와 은규의 내면이 닮아간다는 것, 그래서 점점 어른의 목소리로 변해간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주제일 수도 있겠으나, 그로 인해 캐릭터가 흐릿해진 것 역시 사실이다. 재희 아버지, 그리고 이웃집 노인 역시 손쉽게 다룰 캐릭터가 아니었다. 조금 더 복잡하고 다층적인 모습으로 그렸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소설은 더 큰 질문을 품은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본심에서 관심 있게 본 작품은 <근로하는 자세>와 <안의 세계>, 그리고 <단명소녀 투쟁기>였다.

  먼저 <근로하는 자세>. 이 작가는 의외적인 상황에서 폭발하는 유머의 힘을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세계동물주권보호연대’라는 괴이한 폭력집단에 납치된 환경부 차관과 그 일행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또 한편 조직 안에서 꼼짝달싹 못 한 채 한 마리 참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한 사람의 서사이기도 했다. 조직 내 권력 관계와 그에 따른 에피소드도 실감 났고, 낯선 무대를 만들어내는 문장도 나무랄 데 없었다. 아쉬웠던 점은 독일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의 서사였다. 무언가 마감에 쫓겨 급하게 마무리 지은 듯한 인상을 지울 길 없었다. 죽은 오 과장이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임져주지 않은 까닭에 이때까지 모든 인물이 허무하게 소모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더 긴 분량이 필요한 소설이었다. 충분한 호흡으로 손을 본다면 다른 자리에서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힘을 내길 바란다.

  <안의 세계>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니 벌써부터 마음 한구석이 착잡해진다. 예심 단계에서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이 소설이 당선작이겠구나’ 확신했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은 다양했다. 백 과장의 캐릭터나 방아짐의 상징성, 이레의 내면 등등 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다. 특히 소설 중반에 나오는 백 과장과 노숙자 ‘목’의 삽화는 고스란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혐오와 배제의 속살을 겨누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이 작품은 선택받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랫동안 혼자 고민해보았다. 결론은 이런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건 이 소설이 지닌 어떤 단점 탓이 아니었다는 것. 어쩌면 그건 공모전 특유의 어떤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점과 또 다른 장점 사이에서의 선택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안의 세계>의 작가는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의 장점을 더 밀고 나가길 바란다. 이미 충분히 자기세계를 구축한 사람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당선작으로 뽑힌 <단명소녀 투쟁기>는 일종의 설화 뒤집기 서사였다. 설화를 구축하는 핵심 플롯이 ‘우연’이라면, 이 소설은 ‘투쟁기’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의지와 행동으로 기어이 ‘필연’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 필연의 중심에 ‘이안’이 있다. 자신을 대신해 죽고자 하는 ‘이안’이라는 존재로 인해 이 소설이 설정한 비현실적이고 설화적인 세계는 다시 상징과 현실의 위치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누군가 한 명만 있다면, 그 한 명으로 인해서 ‘나는 나의 죽음을 죽일 수 있다’는 것. 그 문장을 위해 이 소설은 그토록 험난한 길을 달려온 것일 테다. 이런저런 자의식이 있고, 또 이해되지 않는 에피소드도 있었지만, 근래 들어 이토록 폭발하는 문장과 정념을 본 적은 없었다. 비등점 직전까지 다다른 달리는 에너지. 그 에너지가 이 소설을 당선작으로 만들었다.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계속 달려 나가기를 바란다. 나에게 이 작가는 이제 ‘뛰는 작가’로 기억될 것이다. 숨을 참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볼 예정이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 이기호(소설가)




 

응모작을 읽는 시간은 내게 즐겁고도 곤란한 감정을 안겨주었다. 읽은 작품을 세 개의 상자-탈락, 보류, 선정-에 분류해 담았다. 보류에 들어 있는 소설만을 다시 읽을 요량이었으나 내 안목과 취향으로 인해 간과된 작품들이 있을까 두려워 결국에는 탈락과 보류 상자에 든 작품을 모두 재독하게 되었다. 내 소설도 선정 박스보다 탈락 박스에 들어간 경험이 많았기에 – 증거는 없지만 장담할 수 있다. 당선은 단 한 번뿐이지 않은가.- 그쪽으로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탈락된 많은 분들에게 여러 번 즐겁게 읽었다고, 장점을 발견하지 못한 작품은 한 편도 없었다고 전하고 싶다.

응모작들은 전반적으로 일정 수준 이상이었고 독특한 소재, 색다른 이야기, 단단한 문장, 높은 완성도를 보이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여러 작품을 읽어가면서 얼핏 개성적으로 읽혔던 작품들이 실은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변소설, 퀴어, 성장, 여성서사 등 기성작가들이 많이 다루고 있는 소설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소재를 다루는 방식이나 주제에 접근하는 시각은 대동소이했다. 참신함과 완성도가 마치 반비례 관계에 있는 듯 독특한 아이디어는 형상화되지 못한 채 날것으로 남겨졌고 유려하게 세공된 작품은 기시감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예심 과정에서 눈여겨본 작품에 대해 간략히 언급하겠다.

<여행자들>은 바이러스로 인해 여행이 어려워진 근미래가 배경이며, 증강현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한번쯤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형상화시켰다. 무리 없는 서사와 안정된 표현력으로 잘 읽히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런 설정들을 바탕에 두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평이했다는 점,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익숙해서 추측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렸다는 점이 아쉬웠다.

<윗스>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생생하게 그려놓은 인물 각각의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엮여 있지 않고 다른 두 개의 소설처럼 놓여있다. 암시와 단서가 되었어야 하는 것들이 수습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현재 사건을 중심으로 놓고 조금 더 써야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납득될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 소설을 언급하는 이유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들과 낯선 풍경들, 유려한 문장, 긴장감,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언캐니한 이미지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주제와 정서라면 한 가지는 성공했다.

<유로파이터> 외 1편은 개성이 뚜렷하고 유머러스한데다가 가독성이 뛰어났다. 예심작 중에서 가장 에너지가 넘쳤던 작품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인물과 사건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고 표현은 과감하고 거침이 없다. 주제를 향해 돌격하듯 이야기를 빠르게 진행시킨다. 그러나 인물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서사 속에서 대상화된 인물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큰 단점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두 작품 모두 유사한 집단, 비슷한 성격의 인물군을 비슷한 서술 방식으로 다루고 있어서 운 좋게 주제와 작가의 서술 방식이 맞아떨어진 것인지, 아니면 작가의 치밀한 계획하에 선택된 것인지 판단하기 쉽지 않다는 사실 또한 마지막까지 갈등하게 했던 점이었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단을 하나 오르면 4초의 수명이 늘어납니다.> 삶이란 무엇인가, 욕망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인 주제를 고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군더더기 없는 문장으로 속도감 있게 주제를 향해 달려간다. 재미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빌딩의 비밀에 접근하여 정보를 얻는 과정이 너무 쉽다는 점이 아쉬웠다. 건강 장려 문구로 쓰이는 저 낯익은 문장이 소설의 핵심 아이디어인데, 제목으로 노출되어 있어 독자가 내용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등장인물이 화자에게 정보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형식이라 긴장감이 형성될 틈이 없다. 비밀의 은폐와 노출을 플롯으로 가져갔더라면, 인물들을 활용했더라면 작품의 재미와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다. 덧붙여 작품의 결말에서 주제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런 사족이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므로 지양되어야 할 것이다.

<사어>는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말을 잃어버린 여자의 이야기이다. 차분하게 서사를 구축하는 감각, 인물의 심리와 상황에 따른 관계 변화의 양상을 표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시점이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인 이 소설은 주어를 ‘나’로 바꾸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고쳐도 무리가 없다. 3인칭 서술이 독자의 진입을 방해하고 인물을 내면 깊이 파고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1인칭이라면 주인공의 내면을 한층 더 핍진하게 그릴 수 있을 것이고, 독자가 파고들 자리가 생길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가장 중요한 장치, 다이어리에 쓰는 소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파국이 오기까지 하건만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 주인공이 쓰는 소설과 그녀의 현실, 즉 우리가 읽는 이 소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이 소설이 완결될 것이다.

<러스트 보이킨스> 외 1편은 안정된 문장으로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능숙하게 서사를 끌어가는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러나 두 편 모두 많은 부분이 비어 있다. 비어 있음이 주는 정서적 효과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채워진 상태로 소설을 단단히 받치고 있어야 할 부분이 비어 있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이다. 두 소설 모두 주인공의 현재를 뒤흔들고 있는 친구(러스트, 나문)라는 인물이 충분히 그려져 있지 않고 둘의 관계 또한 피상적으로 그려져 있기에 소설의 중심 사건에 흐르고 있는 감정선을 납득하기 어려웠다. 실은 장점보다 단점을 찾기 쉽고 그 단점이 치명적이었으나 그럼에도 황량한 겨울 풍경의 이미지와 자기 파괴 충동을 지닌 주인공의 심리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정서가 강한 인상을 주었다.

 

본심에서 최종적으로 논의된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포비아, 욝, 포비아> 외 1편. 평범한 가정에 내재된 불안을 거침없이 그리고 있는 이 소설을 읽다보면 큰 사건이 곧 터질 것만 같은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약한 신경증을 앓는 인물들, 그들이 맺는 관계들이 독특하게 표현되고, 그들의 심리 변화가 개연성 있게 그려져 소설 속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었다. 단단하고 깔끔한 문장은 가독성을 높여준다. 그러나 결말의 미흡함으로 인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이야기가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개인적으로 문학적인 결말이 아닌 진짜 결말을 보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이 소설이 고안해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누군가의 삶으로 읽혀질 수 있을 것이다.

<안의 세계> 외 1편은 가장 눈에 띄었고 끝까지 손에서 놓지 못한 작품이다. 두 편 모두 노련한 문장과 잘 짜여진 플롯으로 비현실적 세계를 현실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부연 설명 없이 던져진 기이한 정황은 소설의 세계에서는 개연성을 가지고 당연하게 존재한다. 개성적인 인물들과 독특한 관계, 그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이야기이다. 재미와 감동, 정서적 체험을 선사한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두 작품이 각각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있어 함께 있어야 작가의 진가가 모두 드러난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당선작인 <단명소녀 투쟁기>는 재미있고, 황당하고, 감동적인 소설이다. 첫 장을 읽기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 하는 소설이다. 독자는 작가가 만든 세계 속에 그냥 내던져진 채 따라가야 하는 운명에 처해진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해 봐야 어김없이 어긋난다. 인물들과 함께 가다 보면 듣도 보도 못한 신화적인 풍경을 보게 된다.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아야 한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세계이다. 중간에 진입하면 난코스를 만난다. 나는 여기 멈춰서 물음표를 그렸다. 원관념이 부재하는 상징은 공허한 것 아닌가, 결국 이 공허함이 소설의 의미를 희석시키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물음표 따위를 집어삼키고 몰아치는 이야기에 나는 설득이 되어버렸다. 이 도전적이고 독특한 작품이야 말로 박지리문학상의 이름에 걸맞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작가의 성실함과 패기가 독자들을 감응시킬 거라 믿는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보낸다. - 정소현(소설가)


 

5milk 2020-12-28 11:59:31 0

심사평만 읽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구병모, 이기호, 정소현 소설가님 그리고 김태희 편집장님의 애정을 심사평뿐만 아니라 <박지리 문학상> 전체 게시판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응모자, 나아가 쓰는 사람들에 대한 예우가 무엇인지 그 진심을 느끼고 갑니다. 그만큼 당선작이 무척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