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구원의 미술관_강상중 미술 에세이③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퇴폐가 번져나가던 19세기말.
신의 우상이 파괴되고 회의의 바람이 몰아치던 빈.
 
그때 그곳에 등장한 두 예술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실레는
무엇을 보았고,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클림트와 실레은 제 안에서 바로 ‘보들레르 체험’을 통해서 이어졌습니다.
​보들레르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의 성性에 대한 자각과 에로스 감각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강상중 미술 에세이 구원의 미술관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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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도 순진무구함도

거장이라 불리는 화가들은 어째서 대부분이 남성이며, ‘여성’은 마치 영원의 테마처럼 계속해서 그림의 대상이 되기만 한 것일까요. 게다가 그 ‘여성’의 이미지는 왜 청초한 모습이거나 나체이거나 ‘관객’으로 상정된 남성의 일방적인 시선 속에서 상상되었을까요. 미술이나 회화처럼 ‘젠더 바이어스’(사회적 성차의 일방적인 고정화)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세계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아마도 페미니즘의 커다란 테마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겠지요.
 
회화나 미술을 감상하면서 때로는 운명적인 만남이나 감동에 강하게 흔들리곤 합니다. 하지만 제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어떤 식으로 다른 감동이나 인상을 받았을지, 이런 가정을 하고 작품을 접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남자인 것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남성적인 시선으로 미美를 즐겼기 때문입니다. 섹스나 젠더, 에로스를 둘러싼 문제는 심오하며 또 근본적인(래디컬)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세기말적 엑스터시
 
클림트는 19세기 말 빈에서 일어난 새로운 예술 활동의 중심적인 존재로 상류계급이나 살롱으로부터 압도적인 지지와 함께 ‘시대의 총아’로서 사랑받던 화가였습니다. 그 화려한 작풍에 관해서는 더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이미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여성의 관능이 몹시 풍윤하게 그려져 있지만 어딘가 병적인 냄새가 감돌고 있습니다. 현란과 퇴폐가 꼬여 색실을 이룬 듯 뭐라 말할 수 없는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바로 클림트의 매력입니다.
 
클림트의 작품 중에는 사랑하는 남자의 잘린 목을 끌어안고 넋을 잃은 여성을 그린 <유디트>나 임부와 해골을 동시에 그린 <희망>처럼 죽음의 기운이 짙게 느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클림트에 관해 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삶에의 욕동欲動과 죽음에의 욕동)입니다.  
 
클림트의 ‘화려함의 극치’라 할 만한 표현 속에는 어딘가 끝을 알 수 없는 허무함이 깃들어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특히 ‘장식성’과 관련되어 있는데 ‘장식은 사물의 바깥쪽을 꾸미는 것’이라는 장식의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이와 모순될지도 모르겠지만, 클림트의 그림에서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보면, 거기에는 결코 허무나 퇴폐만이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없게 하는 무언가가 숨 쉬고 있는 듯합니다. 제가 가장 끌렸던 작품, 그리스 신화에서 영감을 얻은 <다나에>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 그림에는 다나에의 엉덩이와 허벅지가 풍만하게 강조되어 있고, 허벅지 사이로 황금 비말飛沫이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우스와 다나에가 이룬 사랑의 황홀경을 나타내고 있을 터입니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는 그녀의 자태는 누에고치 안에서 꿈을 꾸듯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홍조를 띤 그녀의 뺨은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몹시 에로틱하면서도 압도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이 작품을 볼 때면 저는 언제나 숨을 죽이고 한동안 그림에 빠져들곤 합니다.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빛나고 있어서 분명히 어떤 면에서는 퇴폐적이기도 합니다만, 저는 여기서 단순한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어떤 종류의 사랑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계절로 말하자면 화창한 봄을 축복하는 듯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풍요롭지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공허하지만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듯한, 이런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클림트의 특징입니다. 생生과 사死, 혹은 삶으로서의 생과 에로스로서의 성性이 색실처럼 꼬여 있으며 동시에 허무함 또한 배태胚胎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클림트 특유의 묘미가 아닐까요. 
 
노출된 영혼
 
에곤 실레는 클림트와 나이 차이는 제법 나지만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실레가 그린 여성은 클림트와는 대조적으로 풍요로움이나 화려함과는 인연이 없는, 오히려 그런 것은 전부 깎아낸 후에 남은 말라빠진 나무 같은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듯 여윈 몸은 울퉁불퉁하고 딱딱하며 이상한 형태로 뒤틀려 있습니다. 
 
실레가 그린 나부는 말하자면 ‘벌거벗은 영혼’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클림트의 작품은 현란하고 화려한 장식성을 휘감고 있는 만큼 공허한 느낌을 줍니다. 반대로 실레의 그림에는 장식성이 전혀 없는 대신 핵核과 같은 것이 있어 욱신욱신 아파올 정도로 존재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것을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실레의 그림은 ‘내면으로서의 나체’이고 클림트의 그림은 ‘장식으로서의 나체’로, 둘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처럼 한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클림트의 여성들은 녹아버릴 듯한 환희 가운데에 있지만, 실레의 인물들은 관능의 환희를 맛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남녀의 성교뿐 아니라 레즈비언 여성이나 혹은 자위 행위를 하는 자화상 등 상당히 아슬아슬한 모습까지 그려냈습니다.
 
예를 들어 <장식이 붙은 담요 위에 누운 두 소녀>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서로 엉켜 있는 그녀들이 엑스터시 상태로 있는가 하면, 그런 느낌은 전혀 없이 각자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서로 안고 있으면서도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실레가 그리는 인물들은 고독합니다.
    
 
 
클림트가 그린 여성과 실레가 그린 여성은 대조적이라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풍요로운 에로스와 바짝 마른 에로스. 환희의 성애와 고독한 성애. 그러면서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퇴폐와 허무. 클림트와 실레가 그린 작품은 모두 제가 반할 만한 타입의 여성들입니다. 그들의 그림은 정말로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친 시대의 공기를 타고 등장한 빛나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을 것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둘에게는 흥미로운 차이점이 하나 더 있습니다. 클림트는 자기 자신이 감상의 대상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 자화상을 전혀 그리지 않았지만, 실레는 자화상의 작가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몇 장이나 그렸습니다. 상징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 클림트와 실레는 신기하게도 둘 다 같은 1918년에 병사했습니다. 여기에도 어쩌면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림트는 쉰여섯, 실레는 스물여덟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미증유의 총력전이 끝나던 해,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4편에서 계속)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