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구원의 미술관#.⑦_바로, 지금, 여기의 존재들

제7화
바로, 지금, 여기의 존재들
 
 
 
강상중 선생님을 매혹시킨 그림들의 특징을 요약하면 ‘살아 있는 존재 그 자체를 드러냄’입니다. 이것은 르네상스 이후에 등장한 미술 경향으로서, 존재와 시간을 초월한 신적인 것의 현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들을 화폭 안에 옮겨놓습니다.
 
이렇게 존재 자체를 드러낸 그림들은 대체로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사회에 불편함을 안겼다고 하는데요… 무슨 이야기인지, 지금부터 살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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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니를 드러내는 자연
 
자연은 인간이나 다른 생물들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엄니를 내보일 때가 있습니다. 대지진과 쓰나미의 무서운 광경을 생각해보면, 자연 그 자체가 평온이나 질서를 구현하는 동시에 모든 살아 있는 생물들의 모범이라는 사고방식에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자연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나 판단을 넘어선 무질서, 바로 그 자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어떤 의미로는 인간 내부에도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몸이나 거기서 발산되는 여러 욕망, 에로스 같은 것은 이성으로 전부 통제할 수 없을뿐더러, 때때로 인간 내부의 자연은 어지러울 정도의 생생함으로 우리들을 덮쳐오기도 합니다.

‘인간 내부의 생생한 자연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고전적이면서도 새로운 테마였습니다. 몸이나 성 같은 생생한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들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생생함과의 만남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프랑스의 귀스타브 쿠르베(1819-1877)의 작품입니다. 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쿠르베의 <돌 깨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을 보았을 때, 현기증이 일 정도로 생생하게 묘사된 사람의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기에는 모든 허식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듯한 육감적인 것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구차한 해석 따위는 갖다 붙이지도 못할 정도의 생생함이 느껴졌습니다.
 

 
 
이 그림에는 그저 망치를 휘둘러 돌을 깨고 있는 한 남자와 부서진 작은 돌멩이가 담긴 바구니를 든 아들로 보이는 소년이 그려져 있을 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옷차림이 너덜너덜합니다. 바구니가 너무 무거웠는지 소년은 힘에 겨워 몸을 비틉니다. 두 사람 모두 고개가 아래로 향해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습니다. 화면 전체가 분진이 가득 퍼진 듯 먼지로 자욱하여 아름답다는 느낌은 솜털만큼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묵묵히 가혹한 작업을 이어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생생하고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활시위를 당기듯 큰 손을 뒤로 젖히고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을 그린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습니다.
 
 
세상의 기원
 
쿠르베가 <돌 깨는 사람들>에서 보여준 생생함은, 더욱 직설적이고 또 어떤 의미로는 이 이상은 없을 정도의 리얼한 작품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한 작품을 본 순간 맛본 선명하고 강렬한 감각을 잊지 못할 정도입니다. 속이 후련할 정도로 당당하게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 바로 <세상의 기원>입니다.

이 작품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풍만한 여성의 음부를 그린 것인데, 말려 올라간 침구 아래로 유방이 살짝 보이면서 육감적인 배, 짙은 이끼처럼 무성한 음모 그리고 그 아래 둔부로 이어지는 뚜렷한 균열까지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생생함의 극치이며 작품 제목 역시 실로 생생하다고밖에는 할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당시 저는 이미 마흔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그림을 보고 느낀 놀라움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예전에 동경하던 연상의 여인이 자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것처럼 결코 봐서는 안 될 것을 보고 말았다는 느낌에 무의식중에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지금이야 여성의 누드 사진이나 그림이 그리 특별하지 않지만, 여성의 음모를 그대로 드러내는 ‘헤어누드’가 허용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19세기 중반에 그려진 이 그림은 전대미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적나라하고 리얼한 힘 때문에 우리는 압도적인 생생함을 그저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본 것만을 그리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쿠르베에게는 생생한 것을 그린다는 의미에서 <돌 깨는 사람들>이나 <세상의 기원>은 차이가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쿠르베 이전 시대의 유럽에서는 문학, 미술, 음악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개인의 사색이나 몽상 등에 가치를 두는 ‘낭만주의’가 주류였습니다. 이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1712-1778)로 대표되는 문예사조인데, 낭만주의에서 자연은 대체로 이상화되고 미화되어 신이 무언가를 드러내기 위해 인간 앞에 현출現出시킨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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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쿠르베의 시대가 되자 이러한 사고방식은 빛을 잃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이상적이거나 아름답지 않으며 때에 따라서는 잔혹할 뿐 아니라 추악하기도 하다는 사고방식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진실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려는 ‘자연주의’나 인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내는 ‘사실주의’가 그렇습니다. 쿠르베는 그 선구자적인 존재였던 것이지요.

쿠르베가 가진 예술에 대한 신념은 ‘나는 보지 않은 것은 그리지 않는다’인데, 이는 가로 6.5미터, 세로 3미터나 되는 <오르낭의 매장>이라는 대작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쿠르베는 고향인 시골 마을 오르낭에서 벌어진 장례 풍경을 사실적으로 생생하게 그렸습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영웅이나 국왕이 아닌, 이름 없는 인간의 장례식을 굳이 이렇게 열심히 그려놓은 것이 이상하다며 이 작품을 혹평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습니다.

루소 이래로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에는 어떤 로맨틱한 것, 시간을 초월한 성스러운 것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성함의 현현Epiphany’입니다. 그러나 쿠르베는 그것이 성스럽든 그렇지 않든, 보이는 그대로의 인간을 <세상의 기원>에 그렸습니다. 자연에 속한 물체 중 하나로서 ‘생생한 몸’을 거기에 딱 놓은 것이지요. 이 호불호를 뛰어넘는 리얼한 박력이야말로 쿠르베의 매력입니다. 확실히 커다란 발상의 전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최종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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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의 미술관』이 드디에 출간되었습니다.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
 
 
 
모두 여러분 덕분이에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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