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홍명희 문학제 강연 :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

벽초 홍명희와 『임꺽정』
 
강영주(상명대 교수, 국문학)
 

머 리 말
1998년 올해는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 1888-1968) 선생이 서거한지 30주년이 되는 해이자, 그가 불후의 명작『임꺽정 (林巨正)』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지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 뜻같은 해를 맞이하여 제3회 홍명희 문학제가 개최됨과 동시에 향리 괴산에 그의 작가적 공적을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순국 열사인 그의 부 친 홍범식(洪範植)선생 추모비도 향리에 세워지게 되니, 더욱 뜻깊은 일이라 하겠다. 종래 세인들에게 벽초는 '식민지시기 사회운동가 중의 한사람' 아니면 '『임꺽정』이라는 역사소설의 작가' 정도로만 미 미하게 알려져왔다. 이는 벽초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 참가 이후 북에 남은 관계로 그에 대한 일체의 논 의가 금기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 근 40년의 세월이 흐른 1985년에야 사계절출판사에서 『임꺽정』이 다시 출판되어 비 상한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그 무렵 월북 문인들의 작품에 대한 출판과 연구가 하용되면서부터 벽초와 『임꺽정』에 대 한 관심도 날로 증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먼저 벽초는 한국근현대사에서 민족해방운동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재평가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그는 육당· 춘원과 함께 신문학(新文學)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을뿐더러, 그의 『임꺽정』은 발 표 당시부터 전 문단적인 찬탄을 받으며 우리 근대문학의 고전이라는 정평을 얻었다. 그러므로 만해 한용운이 저명한 독 립운동가이자 식민지시기 최고의 민족시인으로 평가되듯이, 벽초 역시 민족해방운동의 중요 지도자이자 한국근대소설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되어야 하리라 본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벽초의 삶과 문학적 업적을 되짚어보며 우리 근현대사와 민족문학사에서 정당하게 자리매김 하고자 한다. 이는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대문호(大文豪)를 기나긴 망각과 무관심으로부터 구해내는 역사적 복권 작업 으로서 작지 않는 의미를 지닐 것이다.

1. 홍명희의 삶의 자취
벽초 1888년 7월 3일(음력 5월 23일) 충북 괴산군 괴산면 인산리(동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조선조 명문 사대 부가인 풍산(豊山) 홍씨(洪氏)가이다. 증조 홍우길(洪祐吉)은 이조판서를 지냈고, 조부 홍승목(洪承穆)은 참판을 지냈으 며, 부친 홍범식은 금산군수로서 1910년 경술국치 대 자결한 인물로 유명하다. 벽초는 유년시절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기 글재주가 뛰어났다. 5세 때부터 한학을 시작했는데, 8세 때 이미 한시를 짓기 시작했으며, 난해하기로 유명한 『서경(書經)』『우공(禹貢)』편을 일곱 번 읽고 암송할 정도였다고 한다. 14세 때인 1910년 상경하여 이듬해부터 1905년까지 중교의숙(中橋義塾)에서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906년 일본에 유학 하여 동경 대성중학교(大成中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이 시기 그는 다방면에 걸친 폭넓은 독서를 하는 한편 , 문일평 · 최남선·이광수 등과 친밀한 교우를 맺었다. 그러나 유학시절 벽초는 심한 민족적 차별을 경험했을 뿐 아니라, 당시 조선은 을사조약 이후 급속히 일본의 식민지 상 태로 전락해가고 있었다. 이에 따른 민족적 울분으로 인해 그는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0년 초 귀국하고 만다. 귀국 직후 벽초는 최남선이 창간한 『소년』지에 폴란드 시인 나에모예프스키의 시「사랑」을 비록한 번역 작품들을 발 표하여 초창기의 신문학 운동에 일조하였다. 그런데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함과 동시에, 그에 항의하여 부친 홍범식이 순국하였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그 이후 평생토록 벽초의 사고와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부친의 3년상이 끝난 뒤인 1912년 말경 벽초는 중국에 건너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상해에는 신규식· 박은 식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동제사(同濟社)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 상해시절에 벽초는 정인보. 문일 평·조소앙·김규식 등과 동고동락하면서 깊은 교분을 맺으며, 특히 단재 신채호와 는 평생 지기(知己)로서 막역한 우정 을 쌓았다. 1914년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구출할 목적으로 남양으로 떠나, 싱가폴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 귀국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벽초는 향리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투옥하였다. 출옥 후인 1924 년 동아일보 주필겸 편집국장으로 취임했으며, 그 뒤 시대일보로 옮겨 1926년 시대일보 사장이 되었다. 같은 해 시대일 보가 폐간되자 평북 정주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한편 벽초는 1923년 신사상연구회에 창립회원으로 가담했으며, 그 후 신인 화요회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사회주의 사상단체뿐 아니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한 조선사정조사연구회에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기반으로 벽초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 간의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新幹會) 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창립대회에서 그는 신간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직위인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나 굳이 사양하고, 조직부 총무간사직을 맡아 지회 결성을 비롯한 주요 임무를 헌신적으로 수행하였다. 1929년 신간회 지도부가 광주학생사 건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대회를 개최하려다가 사전 검거되었을 때 주모자의 한 사람으로 구속되었으며, 1932년 출옥하였 다. 언론사에 재직하는 동안 벽초는 동서고금의 이색적인 지식을 소개한 칼럼을 연재했으며, 이를 모아 『학창산화(學窓散話)』(1926년)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하였다. 또한 그는 프로문학 단체 카프(KAPF)의 기관지라 할 수 있는 『문 예운동』에 「신흥문예 운동」(1926년)등 평론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문필활동을 통해 문인으로서도 기대를 모으던 벽초는 1928년 말부터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 하여 일약 인기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신간회 민중대회 산건으로 인한 투옥이나 건강상의 이유 등으로 몇 차례 중단을 겪으면서도 1940년까지 10여년에 걸쳐 연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1939-40년에는 『임꺽정』이 단행본(4 권)으로 간행됨으로써, 그의 작가적 명성은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 일제 말의 암흑기에 지조를 지키며 은둔생활을 하던 벽초는 감격의 해방을 맞이하여 사회활동을 재개하였다. 1945년 말 그는 서울신문사 고문에 취임했으며,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조소(趙蘇)문화협회 회장, 반파쇼 공동투쟁위원회 위원장 등 좌익단체의 지도자로 추대 되는 한편 ,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부회장,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웡 위원회' 상무위원 등 우익단체의 요인으로도 선임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감투들은 대개 좌·우 양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씌워진것이었으므로, 벽초는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한동안 칩거하였다. 그러나 그는 좌·우익의 대립이 날로 격화됨을 우려한 나머지 중간파 정치세력의 결집에 나서게 되었다. 그 일환으로 민주통일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이를 포함한 중도우파 5개 정당을 통합하여 1946년 민주독립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로 취 임하였다. 뿐만 아니라 민주독립당을 기반으로 하여 중간파 세력을 더욱 광범하게 규한한 민족자주연맹을 결성하고 제2 인자격인 정치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석 김규식과 함께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정당 사회단체를 통해 그는 남 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 이를 위해 남북연석회의를 적극 추진하였다. 남북연석회의가 끝난 뒤 벽초는 김구. 김규식 등과 달리 귀환하지 않고 북에 잔류하였다. 1948년 9월 북한 정권이 수립 되자 3인의 부수상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에도 그는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으나, 실세가 아닌 명목상의 지도자 급 인사에 속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1948년부터 1962년까지 내각 부수상직을 연임했으며, 그후 사망시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재직하였다. 이 밖에도 그는 과학원 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 장 등을 역임했으며, 81세 때인 1968년 3월 5일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2. 인간성과 사상
선비정신의 소유자
벽초는 단아한 선비다운 퐁모를 지니고 있었고 , 양심과 지조를 중시했으며, 안목이 높고 결벽이 심하셔서 남달리 겸허 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는 주위에서 '군자님'이라는 별호로 불리웠을 만큼 인격자로 알려져 있었다. 계모 조씨를 오랜 만에 뵙게 되자 버선발로 뛰어나가 마당에서 큰절을 올렸을 정도로 효성스러웠다고 한다. 또한 벽초는 고절(苦節)을 지킨 '개결(介潔)한 지사'요 '양심적인 인텔리'라는 정평이 있었다. 이는 그러라는 식민지 치 하에서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며 신변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인물 이었기 때문이다. 벽 초는 양반계급의 특징 중의 하나로 지조를 들으면서 "대의를 위하여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이 지조중에도 가장 높은 지 조"라고 보았다. 그가 일제 말 심산 김창숙에게 "관 뚜껑이 닫히기 전에는 항복도 하지 말고 모욕도 받지 않으리라."는 한시를 적어 보낸 것은, 일제의 강압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고자 한 그의 자세를 잘 말해준다. 특히 벽초는 자신에 대해서나 남에 대해서나 매우 엄격한 안목을 가지고 평가를 까다롭게 하였다. 남양에 머물고 있던 1910년대에 그는 이광수에게'매일신보에 연재된『무정』을 읽어 보았으나 신통치 않더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 다. 또한 자작(自作)시조를 낭송하며 자화자찬하는 버릇이 있던 최남선에게도 평시 '비판을 몹시 심하게 하였다. '고 한 다. 이 밖에 문일평의 유저(遺著)라든가 심훈의 『상록수』 등에 부친 글들을 보아도 냉철한 나머지 박하기까지 한 평가 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엄격한 평가는 자신에 대해서는 더욱혹독하였다. 벽초는 지나친 결벽 때문에 글을 잘 쓰지 않는 문사로 소문이 나 있었다. 주위의 끝덕진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꺽정』외에 단 한편의 소설도 더 쓰지 않았던 것 역시 그러한 결벽성과 무관하지 않다. 『임꺽정』을 연재할 때 날마다 원고 마감에 쫓기면서도 병적일 만큼 퇴고에 심혈을 기울였으 며, 그러고도 '마음에 안 들어 께름칙하다. '고 말하곤 하였다. 후배 문인들이 『임꺽정』을 예찬해도 "『임꺽정』에야 묘사다운 묘사가 있나 어디." , "문학작품으로 저급이지. " "워낙 밥 얻어먹으려는 계획하에 전설 나부랑이를 모아다가 어 떻게 꾸며놓은 것이니 무어 문학작품이라고 할게 되어야지요."라는 식으로 스스로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않았다. 이상과 같은 특징들은 물론 그의 개인적인 성품이기도 하겠지만 , 동시에 벽초가 사대부가 출신으로서 선비정신을 계승 한 면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는 양반계급이 '관벌주의(官閥主義)' 때문에 유자(儒者)의 본래적인 '인(仁)에서 벗어나 허례(虛禮)와 허의(虛義)에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로써 보면 그는 양반계급을 비판하면서도, 조선시대 선 비문화의 긍정적인 전통은 계승하고자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투철한 반봉건의식
벽초는 양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반봉건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원조는 그가 '기성적인 것'과 '권위'에 대한 '반 항정신'의 소유자로서, "만약 우리가 일제의 침략을 안 받았다고 하면 그는 봉건타도의 계몽가로 발전해왔을 것"이라고 평 하였다. 벽초가 임꺽정과 같은 최하층 천민 출신의 반역아를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을 쓴 것도 이러한 반항정신의 발로 라고 볼 수 있다. 해방 후 청년 학도에게 준 글에서 그는 당시 우리 사회에 청신 활발한 건국 기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일제 여독(餘毒)'과 '봉건 유폐(遺弊)'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를 하루바삐 '탕척(湯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봉건 유폐로 말 하면 우리 의식층에 아직 완강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탕척하자면 " 일제 여독보다 더 많은 시일의 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역셜하였다. 뿐만 아니라 벽초는 당시 양반 출신 인사로서는 놀라우리만큼 인븟과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진취적인 언행을 보여주었다. 그는 장남 기문과 부자간에 담배도 마주 피우고 술도 같이 먹어 세간의 화젯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홍기문은 부친이 "항 상 새롭게 가려는 노력 아래 도리어 후진 청년들에게서 배우려고 애쓴다. "고 하였다. 이처럼 벽초는 우리 사회에 만연 한 조로증( 早老症)을 경계하고 젊은 세대와 격의 이러이 어울리며 그들로부터도 배우려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 때문 에 그는 서울 북촌의 고루한 양반들로부터 '경(經)하다느니, '양반의 체통을 어지럽힌다'느니 하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여성관에 있어서도 그는 대단히 진취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식민지시기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대한 글에 서 그는 "오스트랄리아 북방에 사는 어느 식인종은 주린 창자를 채울 것이 없으면 저의 아내를 통으로 구워서 뜯어먹는 일이 있다고 합디다. 소위 문명한 민족들의 사회에서도 여자가 간접으로 남자의 식료품이 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일 종 자리 제구(諸具)로 알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일종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은 식표물으로 치는 것보다 무엇 나을 것 있습 니까."라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착취를 풍자하였다. 그리고 "완전히 합리적 인류사회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적· 문화적으로 활동할 균일한 기회를 가질 것"이라고 하여, 남녀평 등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피력하였다. 또한 해방 후 벽초가 주도한 민주통일당과 민주독립당의 정책을 보면, "여자의 시간과 정력을 가정생활에 전부 소모치 않도록 공동식당. 공동탁아소. 공동세탁소 등의 시설을 속히 보급시킬 것"이라는 이색적인 조항을 두어, 여성을 가사노동 에서 해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도까지 나열하고 있다. 이는 바로 여성해방에 대한 벽초의 지론이 반연된 것이라 하겠다.

진보적 민족주의 노선
말년에 벽초는 자녀들에게 "나는『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가. 일생 동안 애 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 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세라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 "고 말했다고 한다. 이러한 술회대 로 그는 평생 민족의 해방과 통일 독립을 위해 헌신하는 애국자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사회운동가로서나 작가로서나 벽 초의 사고와 행동을 규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민족의식이었다. 을사조약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시기에 일본 유학 체험은 벽초를 예민한 민죽의식의 소유자로 바꾸어놓았다. 대한제국 고관의 자제였던데다가 대성중학교 재학시 학업성적이 출중했던 그는,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은근히 얕보거나 일본인 학우 들이 자신을 질시하는 태도에서 심한 민족적 모욕감을 느꼈다고 한다. 유학시절 『대학흥학보』에 기고한 「일괴열혈(一傀熱血)」이라는 논설문을 보면, 당시부터 그가 열렬한 애국심을 지닌 우국지사였음을 알 수 있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부칙 홍범식이 비분 끝에 자결한 것은 벽초로 하여금 투철한 민족의식을 갖게한 결정적인 사건이었 다. 홍범식은 유서에서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나 조선사람으로서의 의무와 도시를 다하여 잃어진 나라를 기어 이 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벽초는 이러한 부친의 유언을 각골명심하여 평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가 1910년대에 상해와 남양에서 해외 독립운동에 투신하고, 3·1운동 당시 괴산 만세시위를 주도한 것은 모두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실천하고자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1920년대 들어 조선에 사회주의 사상이 소개되면서부터 그는 민족해방 운동의 일환으로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시즘 서적을 읽기도 하고, 신사상 연구회. 화요 회와 같은 사회주의 사상단체에 가입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시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벽초의 정치활동을 통틀어보면, 그는 좌· 우익의 대립을 지양하는 민족통일전선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식민지시기에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고 해방 후 단정 수립을 반대하여 남 북연석회의를 추진한 것은 이러한 그의 정치노선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간회 창립에 즈음하여 발표한 「신간회의 사 명」, 중간파 정당 창당에 앞서 발표한 「나의 정치노선」, 그리고 남북연석회의 직전에 발표한 「통일이냐 분열이냐 」 등의 논설을 통해 그는 좌·우의 대립을 초월한 민족의 대동단결을 촉구 하였다. 종래 벽초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서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중간파' 등등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딱지가 붙 여졌다. 벽초는 전세계 피지배계급의 해방을 추구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인류의 궁극적인 목표로 간주하면서도, 그를 향한 도정에서 우리 민족의 해방과 통일 독립을 최우선적인 당면과제로 보았다. 그리하여 이 민족적 과제를 완수하는 것 을 자신들 세대의 시대적 사명이자 자기 개인의 필생의 목적으로 삼고, 이를 위해 일생 동안 분투 노력하였다. 이러한 벽초의 정치 노선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진보적 민족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3. 『임꺽정』의 민족문학적 가치
민중성과 리얼리즘
벽초의 『임꺽정』은 무엇보다도 그 민중성과 리얼리즘의 면에서 탁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우리나라 역 사소설들은 지배층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궁중비화나 권력투쟁을 다룸으로써 통속적인 흥미를 자아내려고 한다. 그리고 유명한 역사적 인물의 전기 형식을 취함으로써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 아닌 위대한 개인으로 보는 영웅사관을 답 습하고 있다. 이와 달리 『임꺽정』은 주인공 임꺽정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분의 하층민들을 등장시켜 당시의 민중생활을 폭넓게 묘사 하고 있다. 또한 임꺽정의 전기 형식을 피하고, 청석골의 여러 두령들도 그에 못지않게 큰 비중을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 이와 아울러 주목할 것은 주인공을 결코 영웅으로 미화하지 않은 점이다. 휘하의 두령들과 마찬가지로 임꺽정 은 남다른 능력과 함께 인간적인 약점도 지닌 인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서구의 리얼리즘소설에 비해 볼 때 우리나라 역사소설들은 등장인물들의 일상적인 삶과 생활환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 는데 등한하다고 지적된다. 그런데 『임꺽정』은 식민지시기는 물론 오늘날의 역사소설들에 비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 할 만큼 세부묘사가 정밀하고, 조선시대의 풍속을 탁월하게 재현하고 있다. 다양한 계층의 인간들이 등장하여 밥먹고, 옷 입고, 뒤 보고 , 배탈 나고, 장기 두고, 아기자기한 부부의 정을 나누는 등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묘사가 매우 풍부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득특한 흥미를 불러일이킨다. 그러므로 김남천은 "사실주의 문학이 가지는 정밀한 세부묘사의 수법은 씨(벽초)에 있어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이 되어도 무방할 것'이라고까지 극찬하였다.

'조선 정조(情調)'의 표현
벽초는 『임꺽정』을 집필하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 쓰기 사작할 때 에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지요. 그것은 조선문학이라 하면 예전 것은 거지반 지나 (支那) 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사건이나 담기어진 정조(精調)들이 우리와 유리된 점이 많았고, 그리고 최근의 문학은 또 구미문학의 영향을 받아서 양취(洋臭)가 있는 터인데 『임꺽정』만은 사건이나 인물이나 묘사로나 정조로나 모두 남에 게서는 옷 한벌 빌려입지 않고 순 조선 거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이것이 나의 목표였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말대로 『임꺽정』은 '조선 정조'를 적극 표현함으로써 민족문학적 개성을 탁월하게 성취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서구 리얼리즘소설의 예술적 성과를 충분히 흡수하고 있으면서도, 이야기투의 문체를 취하여 구수한 옛날 이야기의 한 대목을 듣는 듯한 친숙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전래의 민담이나 전설 등이 적재적소에 삽입되 어 흥미를 돋우고 있으며, 관혼상제, 세시풍속, 무속 등 조선시대의 풍속들이 다채롭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국어학자 이극로가 "『임꺽정』이라는 이 '어광구(語鑛區)'안에는 깨끗한 조선말 어휘의 노다지가 쏟아지는 것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고 했듯이, 한문투 아닌 우리 고유의 인명이나 지명, 토석적인 고어와 속담들이 풍부하게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꺽정』의 등장인물들은 결코 현대인들처럼 그려져 있지 않고 , 어디까지나 조선시대 우리 민족의 전통 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그들은 순박하고 인정이 넘치며 밑바닥 삶의 고난을 해학으로 넘기는 민중적 지혜를 지닌 인물들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가 박종화가 『임꺽정』에는 조선사람이라면 잊어비릴 수 있는 '구수한 조선 냄새'가 배어 있다고 한 것은 정곡을 얻은 말이라 하겠다.

프로문학과 민족주의 문학의 대립을 넘어서
『임꺽정』연재가 시작되던 무렵 우리 문단에서는 프로문학과 민족주의문학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국내의 사회운동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노선으로 분열 대립하고 있던 것과 상응하는 현상이었다. 바로 이 시기에 벽초 는 신간회운동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간의 민족협동전선을 추구했듯이, 『임꺽정』을 통해 프로문학 과 민족주의문학의 대립을 넘어선 진정한 민족문학을 제시하고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연재 초기에 벽초는 "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그가 가슴에 차 넘치는 계급적 ○○(증오)의 불길을 품고 그때 사회의 ○○(반기)를 듣 것만 하여도 얼마나 장한 쾌거였습니까."라고 하면서, 이러한 인물은 " 현대에 재현시켜도 능히 용납할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계급모순에 저항하는 임꺽정의 반역자적인 면모에 강한 매력을 느껴 창작에 임한 것이다. 그 점에서 『임꺽정』은 계급의식의 표현을 중시하던 당시의 프로문학과 다분히 친화성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벽초는 『임꺽정』에서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을 의도하였다. 그 결과 이 작품은 하층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하면서도 이를 포함한 민족공동체의 아름다운 전통을 적극 재현함으로써, 민족문학적 색채가 농후한 역사소설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임꺽정』은 식민지시기 프로문학과 민족주의문학의 대립을 지양하고 양자의 장점을 종합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될 만하다. 벽초는 신간회운동을 추진하던 그 정신으로 『임꺽정』을 창작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작품 당시 좌· 우를 막론한 전 문단으로부터 찬사를 받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 생각된다.

전통의 계승과 근대성의 성취
『임꺽정』이 우리나라와 중국의 고전문학으로부터 영향받은 측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수호지』나 『홍길동전』과 같은 의적(義賊)소설의 계보에 속하며, 독립된 이야기들이 모여 한 편의 대하장편소설을 이 루는 구성방식이 『수호지』와 유사하고, 야담과 야사에서 소재를 취했으며, 이야기투의 문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벽초는 소년시절부터 『삼국지』를 비롯한 중국소럿들을 탐독했으며, 당대의 유수한 한학자로서 평소 많은 한적(漢籍)을 섭렵하였다. 이와 같은 남다른 소양이 『임꺽정』의 창작에 큰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 이다. 그러나 이러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임꺽정』이 성취한 근대적인 장편소설로서의 예술성을 간과하기 쉽다. 등장인물을 각 계층의 전형으로 형상화하고, 수설 적설명이 아니라 장면 중심의 객관적 묘사에 치중하며, 극도로 치밀한 세부묘사를 추구한 점 등은 우리 고전소설의 전통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요소로서, 서구 리얼리즘소설의 성과를 섭취한 결 과로 보아야할 것이다. 벽초는 일찍이 동경유학시절부터 도스또예프스끼. 똘스또이 등의 러시아 소설을 탐독했으며 나쯔메소세끼(夏目 石)나 일본자연주의 작가들의 소설이 많이 읽었다. 특히 러시아 소설에 심취하여 당시 일역(日譯)된 작품들은 모조리 사 모았 을뿐더러, 유학하여 문학을 연구하고자 한때 러시아어까지 배웠다고 한다. 「대 똘스또이의 인물과 작품」이라는 장문 의 평론을 보면, 그가 똘스또이의 위대한 리얼리스트로서의 면모를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30년 대에 벽초는 당시 부르주아 리얼리즘소설의 고전으로 재평가되던 발자크 전집도 독파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임꺽정』이 식민지시기의 어떤 소설보다도 근대 리얼리즘소설의 원리에 충실한 작품이 된 것은 결코 우 연이 아니라 하겠다. 벽초의 술회에 의하면, 『수호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는 독특한 구성방식조차도 실은 러 시아 자연주의 작가 쿠프린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을 것이라 한다. 그러므로 『임꺽정』에 대한 이러한 전통과 서구 근 대문학의 성과를 훌륭하게 통합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할 것이다.

맺 음 말
이상에서 벽초의 삶과 사상, 그리고 『임꺽정』의 민족문학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작가로서의 벽초를 이야기하면 서 그가 평생에 걸쳐 진정한 애국자로 살려고 노렸했으며 진보적 민족주의 노선을 실천하고 했던 사실을 거론하는 것은 문학과 무관한 비본질적인 논의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임꺽정』이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으로서 뚜렷한 민 족문학적 개성을 성취했으며 민중성에 투철한 역사소설이 된 것은 벽초의 남다른 애국심이나 진보적인 의식과 결코 무관 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전통적인 한학의 세계로부터 근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사상을 부단히 확 장해나간 특이한 지성의 소유자였다. 당시 한학 소양만을 갖춘 지식인들은 전통사상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 가 많았다. 반면 한국근대문학을 개척한 대다수의 문인들은 서구와 일본의 근대문화에 몰주체적으로 감염되었던 것이 사 실이다. 이들과 달리 벽초는 전통사상과 근대사상을 융합한 예외적인 지식인이었다. 『임꺽정』이 동양 고전문학의 전 통과 서구 근대문학의 성과를 훌륭하게 통합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