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춘단 대학 탐방기』 서평 - 생생하고, 뼈저린 ‘아무개’ 이야기

생각해보면 대학을 나왔다고 해서 별 도움이 된 것도 없다. 신문사를 다닐 때 호봉에 조금 반영된 것 정도. 대학 4년 다닌 것 만큼이라는데 그래봐야 몇 만원이었다. 대졸자라고 해서 원고료를 더 준다거나, 연봉 협상에 유리하다거나 그런 건 없다. 동창회를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끌어주는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바라지도 않고.

 

 

생각해보니 양춘단이 대학을 다닌 것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것도 같다. 예순이 넘은 양춘단은 뒤늦게 대학에 간다. 입학한 것은 아니고 미화원으로 취업을 한다. 하지만 남편의 병간호를 위해 서울로 올라온 양춘단은 그것이 ‘대학을 가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대학 캠퍼스에 들어가고, 강의실에서 교수의 수업을 들어보기도 하고, 인적이 드문 곳에 앉아 점심을 먹는다. 미화원들이 임금 삭감과 소장의 폭행 등에 항의하여 파업을 했을 때 참여하지 않은 이유도 그것이었다. ‘나는 돈보다는 대학에 댕기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께 이 일을 그만두고 싶진 않아라.’


지금의 대학 진학률은 70%를 넘지만 1980년대에는 30%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는 더 없었고, 여성인 양춘단이 대학을 가는 건 거의 기적이었다. 시골의 석공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근처 마을로 시집을 간 양춘단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대학이란 건 아주 공부를 잘 하고,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사람들이나 가는 곳이었다. 대학을 간 첫째 종철이는 요절했고, 둘째 종찬이는 아예 가지도 못했다. 대학은 아주, 아주 먼 곳이었다. 그러니 뒤늦게 대학을 가게 된 양춘단이 얼마나 기뻤을까.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의미이겠지만.


하지만 ‘대학’이란 곳은 뭔가 이상하다. 처음에는 몰랐다. 양춘단에게 대학이란 일종의 이상향 같은 곳이었다. 동료들이 따돌림을 해도, 난데없이 야간반으로 옮겨져도 양춘단은 흔들리지 않는다. 대학을 다닐 수만 있다면 되니까. 그런데 물음이 생긴다. 미화원들이 소장의 횡포에 항의를 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그런데 편지를 누구에게 부칠 것지를 모르겠다. 대학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대학이 누군데?
결국은 제일 위에 있는 총장이 대학의 주인 아닌가. 아니, 내가 듣기로는 총장을 임명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던데. 대학이란 건 여기 부지랑 건물들을 말하는 거 아니었어? 숫자를 봐, 뭐가 제일 많아? 학생들이잖아. 대학은 학생들을 말하는 거라고. 하지만 학생들을 다스리는 건 교수인데. 교수는 또 총장 밑이잖아.

 

헷갈린다. 대학의 주인은 총장인가, 교수인가, 학생인가, 교직원인가. 아니면 그냥 대학 캠퍼스 자체인가? 박지리 작가가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쓴 시점은 2009년이었다. 출판할 기회를 찾지 못해 묵혀두고 있던 원고였단다. 그런데 2011년 홍대에서 ‘청소노동자 투쟁’이 벌어졌다.『양춘단 대학 탐방기』에 나오는 미화원 혹은 청소노동자들의 이야기가 중요한 현실의 사건으로 벌어진 것이다. 작가는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위험한 순간을 미리 감지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대학은 사회에 나가기 전에 필요한 교양, 학문과 기술을 익히는 곳이지만 한국의 대학이라는 곳은 오히려 사회의 모순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복마전이다. 취업률이 떨어지면 학과가 사라지고, 인간으로서 필요한 교양을 익히기보다는 취업준비에 매달리는 학생이 태반이다. 교수가 되기 위해서는 줄을 잘 잡거나 돈을 바쳐야만 한다. 엉망진창인 대학에서 미화원은 가장 아래에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학에 속해 있지 않다. 용역회사에서 파견을 보내고, 그들이 어떤 처우나 학대를 받건 대학은 상관이 없다고 발뺌한다.

 

더러운 화장실은 싫어하면서 청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래서 청소를 하겠다고 온 건데, 이제는 청소하러 온 사람을 더럽다고 싫어하는 꼴이잖아.

 

오로지 대학을 다니고 싶었던 양춘단은 뒤늦게 알게 된다. 대학이라는 곳의 정체를, 그녀가 살아왔던 사회의 정체를. 착취라는 의미를 배우고, 우연히 만난 시간강사의 고통을 통해서 대학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그동안의 인생을 돌아본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절대 나이 들지 않을, 영원히 젊고 배운 사람들로만 가득 차 있을 이곳에서 쓰레기 봉지를 어깨에 멘 채 복도를 오가는 춘단은 벽에, 바닥에, 때로는 누군가의 발등 위에 겹쳐지는 작은 그림자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결코 우리들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


처음 『양춘단 대학 탐방기』란 제목을 듣고, 앙꼬가 그린 표지를 보면서 어떤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앙꼬가 그린 양춘단은 언뜻 보기에는 ‘할머니’ 같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눈매나 턱의 윤곽이 젊은 처자는 분명히 아니고, 적어도 중년 이상이었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눈썰미 없음을 탓하며 다시 본 표지는 그럴싸했다. 단순한 탐방이 아니다. 1944년생인 양춘단이 대학에 가는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냥 들어보면 아주 별다를 건 없다. 하지만 그 시절들이 과연 어떤 시절들인가. 양춘단의 인생은 시골에 뚝 떨어져서 외따로 살아온 삶이 아니었다.


양춘단의 첫째 아들 이름은 종철이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1987년이 떠올랐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발표했지만 물고문으로 살해당한 대학생. 양춘단의 아들은 물에 빠져 자살했고, 시간강사도 그렇다. 시간은 흐르지만, 악행은 사라지지 않고 반복된다. 억울한 죽음은 여전하고, 피를 토할 것 같은 억울함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잊어버리면 다시 같은 일이 되풀이된다. ‘시간은 되돌려지지 않았고 강사는 나타나지 않았고 사라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춘단은 이유를 몰랐다. 그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학에 가서야,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의 죽음을 보면서, 그의 억울함을 지켜보면서 깨달았다. 그러니까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할머니 양춘단이 대학에 가서 비로소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세계를 돌아본 이야기다. 그 전에도 보았지만 미처 눈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들을,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때로 구슬프게, 유장하게, 익살맞게 마치 양춘단이 만담처럼 과거를 털어놓듯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양춘단만이 아니라 소설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책을 덮고 나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건 ‘모두 실제 인물이다. 분명, 본 적 있을 거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우리 곁에 존재하는 아무개이기 때문이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그렇게 생생하고, 뼈저리다.

 

  |김봉석(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