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이 아닌 숲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세상에. 남편이 이유식도 만들 줄 안다고? 헐. 출근할 때 아침밥도 해 준다고?

혜영이는 진짜 좋겠다. 시집 잘 갔어."


혜영과 승범. 우리는 아이 하나를 둔 결혼 4년차 부부다. 직업이 같고 가치관이 비슷하며 성격도 둥글둥글하다. 서로의 생활을 존중하고, 가사와 육아를 균등히 담당하려 노력한다.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이상적인 커플로, 잉꼬부부로 알려져 있다.

혜영은 작년 봄에 출산하고 꼬박 1년 동안 갓난아이를 돌보다가 올해 복직했다. 지금은 내가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유식을 해 먹이고, 문화센터에 다니며, 동네를 산책하고, 아침밥을 차려 출근길을 배웅한다. 혜영이 하던 걸 그대로 따라한 것뿐인데 칭찬 세례가 쏟아진다. 문화센터 선생님에게, 처댁 식구들에게, 짝꿍의 조리원 동기들에게, SNS 친구들에게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자상한 아빠이자 남편이 되어 있었다.


 

혜영은 지난 해 (채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나보다 더 많은 걸 했다. 이유식을 만들 때에도 영양 균형을 꼼꼼하게 고려해 식단을 짰다. 자기가 잘하는 음식이 아니라 상대방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아침 밥상을 차렸다. 배우자 가족을 위한 감정 노동도, 육아 지식 습득을 위한 공부도, 집안 행사와 주말 나들이 준비도, 수입과 지출 관리도 더 많이 했다. 모 국회의원이 그렇게 방지하려고 애썼던 슈퍼우먼이었지만, 혜영은 훌륭한 아내라고, 엄마라고 칭찬받지 않았고 사람들은 내게 장가 잘 갔다는 인사치레를 건네지 않았다. 대체 어째서? 여자니까 엄마니까? 당연하다고 퉁치기엔 너무했다.

『평등은 개뿔』의 주인공 혜원과 은홍은 우리와 꼭 닮았다. 서로가 결혼 전 꿈꿨던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 정의롭고, 현명하고, 지혜로우며 직업마저 비슷해 서로를 잘 이해했다. 둘 다 프리랜서라 24시간 내내 붙어 있을 수 있다니 이보다 완벽할 수 없어 보였다. 부부는 알콩달콩한 삶을 꿈꿨고, 실제로 평등했으며, 행복했다. 얼마간은 말이다.

결혼한 부부의 삶은 “둘만의 문제가 아니”(78쪽)었다. 씩씩함과 당당함으로만 살아가기에 세상은 지나치게 기울었고 도사린 장애물도 많았다. 아기에게 아빠의 성을 물려주는 게 당연했고, 육아와 가사는 엄마가 도맡는 게 상식이었다. 시어머니도 친정 엄마도 설거지하는 아들(사위)을 견디지 못했고,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이 힘들어질 때 커리어를 포기할까 고민하는 건 여자였다. 작품 제목인 “평등은 개뿔”이라는 말이 입에서 절로 나왔다.



 

혜원은 평등하고 진보적인 부모님을 만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 세상에 대해 알기 위해 노력했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며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싸워 왔다. ‘좋아해서’ 그러는 거니까 남자아이의 괴롭힘을 이해하라던 선생님, 여성을 노린 계획 범죄를 ‘묻지 마 범죄’라고 부르는 언론과 경찰, 성추행을 당한 뒤 범인을 잡아 달라고 소리친 자신을 따갑게 바라보던 사람들, 건축주인 내 말을 무시하고 남편의 말만 듣던 건축사무소 소장을 묵인하지 않았다. 평등한 관계 설정을 위해 호칭을 바꾸고, 균등한 가사 노동을 제안하고, 성추행과 성희롱을 지적하고, 성적 대상화를 비판해 왔다. 정글을 숲으로 바꾸고 싶었을 뿐인데, 불합리를 따지고, 부조리에 적극적으로 항의하는 사이에 혜원은 “이기적이고 드세고 독한 여자, 남편 기죽이는 여자”(77쪽)”가 되어 있었다.

은홍은 아내의 권유로 앉아서 오줌 누는 삶에 적응하고, 잡혀 산다고 친구들이 면박 주자 꼴통이라고 받아치는, 나름 노력하는 남자다. 음식 당번을 거르기 일쑤고, 기저귀 가는 방법도 모르지만
 

"나 같은 남편이 세상에 어디 있다고. 내가 널 얼마나 잘 도와주는데…"


라며 기세등등하다. 가사와 육아 분담을 비교하는 대상이 함께 사는 아내가 아니라 손발 까딱 안 하는 다른 집 남자들이기 때문이다. 은홍의 친구들은 “초장에 확 눌러야”(61쪽)한다고 은홍을 부추기거나, “남편 기죽게 부려 먹지 말라고”(75쪽) 혜원에게 경고한다. 민주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맺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한국 남자들에게는 결혼 생활도 권력 투쟁이자 파워 게임이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지원에 고무된 은홍은 반격을 시도하지만 금세 자신의 주장에 마땅한 논리가 없다는 걸 인정한다. “난 그냥 사람들이 하는 대로…” “그게 그냥 원래 그랬으니까…”


 

은홍은 쉴 새 없이 잘못하고 사과한다. 혜원은 줄기차게 지적하고 설득한다. 번번이 실수하는 은홍은 나쁜 남자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온 보통 남자라서 갈등이 생긴다는 게 아이러니다. 전통과 관습으로 포장된 가부장제의 병폐와 해악은 여성의 삶을 착취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한쪽에서는 남자는 그래도 괜찮다며 위무하고, 다른 쪽에서는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고 자조하는 현실은 남성의 자립과 성숙을 방해한다.

『평등은 개뿔』을 읽는 내내 지난 10년 동안 나와 함께 공부했던 남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파걸 열풍이 불었던 시대에 학교를 다녔고, 엄마와 여자 선생님으로부터 통제와 관리, 감독과 구속을 받아 온 친구들. 이들의 성장 과정에는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이 없다. 수많은 지표와 통계가 여성의 척박한 삶을 증언하지만 자신의 심리적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에, 당장 내 삶이 팍팍하고 막막하기에 거부하고 기각한다.

상당수의 젊은 남성들이 페미니즘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지만, 이들은 항간의 주장처럼 괴물이거나 차별주의자는 아니다. 오히려 공정함과 평등을 지향하고 고정된 성 역할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과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다. 다만 여성의 삶을 모르고, 페미니즘의 주장을 오해하고, 갈등을 유도해 이익을 보는 자가 있고, 공정함과 평등에 맥락이 소거되어 있어서 그렇다.

『평등은 개뿔』을 통해 우리 남성들은 겪을 일 없고 그래서 관심 가지지 않았던, 여성을 향한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편견, 폭력을 깨달아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거두면 좋겠다. 대체 어디에서 여성이 차별받는지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다면, 차곡차곡 페이지를 넘겨 가며 여성의 삶을 접해 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동료 시민 여성의 고충을 인식하고, 미래 여자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데 힘을 모으면 좋겠다. 고정관념과 편견에 함께 저항하며 더불어 자유롭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도록. 싸워야 할 쪽과 연대해야 할 쪽을 제대로 구분해 과녁을 정확히 겨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니까. 페미니즘은 여성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며, 좁고 딱딱한 틀에 갇힌 남성의 숨통도 틔워 줄 수 있으니까.

"페미니즘은 차별이 아닌 평등, 억압과 구속이 아닌 자유를 지지하는 지극히 건전한 사상이니까"
「평등은 개뿔」 200쪽


 

혜원과 은홍은 부부의 삶만 바꾸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공부하고 행동하며 인식과 실천의 지평을 확장한다. 정상 가족과 비정상 가족을 나누는 폭력에 반대하고, 동성애자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곡해를 지우며, 마을 사람들의 성 역할 인식을 바꾼다.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로부터 파생된 부조리를 인식하고, 현실 세계의 문제를 개선하고 타파하며, 다른 소수자에 대한 편견에도 맞서 싸우고 연대하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보여준다. 그들이 바꿔 낼 세상에서는 장애인도, 노인도, 비인간동물도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의 아픔을 들여다보려는 사람이 많은 사회가 건강하고, 크기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환부가 있으며 상처에 바르는 약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최승범(고등학교 교사,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