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사랑할 나의 아버지에게 : 김현정

제1회 청소년 독후감상문 대회 청소년부 우수상
김현정
 
 
 
어스름한 새벽을 뚫고 느껴지는 시원한 바람. 어느덧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끼며 난 빙긋이 미소 지었다. 독서의 계절 가을. 그 가을의 첫머리에 오랜만에 만난 책이 들려 있었다. 미미하지만 손때 묻은 나만의 책.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던 날』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자전적 소설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책을 좋아했음에도 이렇다 할 책을 많이 접해 보지 않은 나였다. 위 책도 선생님의 추천으로 내가 직접 사 온 책이다. 한창 중학교 생활에 마냥 즐거웠던 나. 하지만 이 책과 함께한 나의 중학교 시절은 그렇게 밝지만은 않았다. 이제부터 난 짧고도 긴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가려 한다.
 
IMF. 누가 이때로 돌아가고 싶어할까? 나 역시 이때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 웃던 날보다 울던 날이 많았던 그때. 그랬다. 아버지의 실직. 언제 일어설지 모르는 아버지의 그늘 가득한 뒷모습은 차라리 안 보는 게 더 나았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옛날이었는데. 하지만 내 앞엔 이런 과거도 되돌아볼 수 없었다. 실직 뒤로 힘들어져만 가는 집안 사정 속에 평범한 가정 주부에서 고되고 힘든 생활 전선에 뛰어드신 어머니를 보며 나는 무능력한 아버지가 너무나 미웠다. 힘든 엄마를 도와주지 않는 아버지가 너무 싫어 집에 가기가 주저됐다. 친구들 사이에선 언제나 밝고 명랑하지만 집에 가면 생명력을 잃는 존재. 그게 나였고, 그 당시의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깨달음이랄까, 여하튼 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눈을 만들어 주었다. 이 책의 작가 뉴턴 펙의 동심 속의 아버지.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검소하게 생활하며 근면한 농부. 365일 손에 돼지 피를 묻히면서도 환하게 웃을 줄 아는 모습을 내 머릿속에 그려 보며 그 위에 겹쳐지는 것은 나의 아버지였다. 순간 응어리졌던 무언가를 한꺼번에 분출이나 하는 듯이 나는 그렇게 한동안 눈물을 토해 냈다. 

난 그때 소설 속, 아니 실제 존재했던 또다른 아버지에게서 깊은 부러움과 그리움을 느꼈던 걸까? 솔직히 지금에 와서 그런 감정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일기장 가득 채워졌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들. 하지만 어쩌면 그 원망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아니라 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야말로 난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니까. 여태까지 난 아버지께 무엇을 했을까? 아버지께서 힘든 일에 땀 흘리셨을 때도 난 모른 척 나만의 생활을 하기에 바빴다. 장난이라도 아버지께 말을 걸어 볼 생각도 안 했었다.

이 소설의 작가가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진 건 어쩌면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마디가 박인 손을 잡고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용기와 사랑. 돈도 많이 벌지 않고 오히려 손에 짙은 피비린내를 풍기는 아버지지만 전혀 개의치 않고 품에 안겨 빙긋이 미소 지을 수 있는 순수함. 작가 뉴턴 펙의 동심은 아버지로 인하여 순수하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그 이유는 조금은 가난한 환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에 이것 때문이 아닌가 싶다.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서만이 아닌 아버지에게서 또다른 삶의 애환과 사랑을 느낀 것 말이다. 꼭 남자 대 남자로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자식과 아버지라는 혈육의 무언가에서 얻어지는 정신적 육체적 성장 말이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 그때 내가 책을 부여잡고 쉴새없이 울었던 이유가 아닌가 생각했다. 나도 사실은 아버지의 그런 모습들을 알고 있었고, 함께하고픈 마음속의 깊은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서 말이다.

요즘만이 아니라 그 전부터 우리 나라 경제가 많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말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발생하는 갖가지 범죄와 자살 등으로 심각한 아노미 현상을 겪고 있는 요즘, 나는 새삼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힘들었지만 항상 옆에 있어 주셨기에. 그리고 한때 밉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늦게라도 소중함과 사랑을 느끼게 해 주셨기에. 

깊은 새벽에 풀벌레 소리를 친구삼으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다시 한 번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 책으로 인한 옛 기억에 대한 웃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몇 가지 더 깨달은 것이 있다. 그 힘들었던 때의 과거는 이제 잊고 싶고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가 크게 성장한 중요한 밑거름이자 그 나름대로의 소중한 옛 추억이었음을. 그리고 이제는 용기가 생겼다는 것. 내 주위 사람들, 특히 가족이 지치고 힘들 때 작은 미소로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생겼다는 것. 더 이상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어느새 거울 속의 내 모습은 소년 뉴턴 펙처럼 자라 있었다.

“아빠랑 보낸 지난 13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예요.”

언젠가 나도 그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여기 있는 작가보다 더 멋지게 말할 것이다. 물론 그때는 용기가 아닌 진정한 존경과 사랑 가득한 모습으로 말이다. 

선선한 밤, 문득 아버지가 그리워 불러 보고 싶다. 내 아버지, 영원히 자랑스럽고 사랑할 내 아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