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읽기 전, 박지리 발견기 (feat. <싸이퍼> 탁경은 작가)

힙합 장르를 소재로 청소년들의 꿈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풀어간 소설 <싸이퍼>로 제14회 사계절문학상을 받은 탁경은 작가가 제8회 사계절문학상 수상자인 박지리 작가의 <합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고 박지리 입문기를 써 주셨어요. 일단 입문 단계니 편안~한 마음으로 한번 읽어볼까요~?
 

-박지리 작가 입문기-

 
1. 초급편: 합★체    

묘시에 일어나 오시에 태양의 정기를 받고 자시에 누운 적 있니?’ 

   한 편의 소설에서 매력을 느끼는 지점은 개인마다 다를 것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합, 체 형제가 계룡산 형제동굴에서 수련하는 장면을 고를 것이다. 형제는 고립된 공간에서 자연에 물들고 서로의 속내를 주고받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근기와 인내를 배운다. 독자는 그 장면에 홀딱 빠져들어 형제와 함께 형제동굴에서 24일을 함께 보낸 것만 같다.
   형제동굴에서 그들이 하는 수련의 내용도 흥미롭다. 비범한 듯 보이나 실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동양철학과 음양오행론에서 오래도록 강조해온 잘 사는 비법이 다름 아닌 비기였던 것. 일찍 일어나 일찍 자는 것, 태양의 흐름에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 등등.
   뭐니뭐니 해도 작가의 특장은 살아 있는 대사가 아닐까. 이토록 입맛이 살고 입에 쩍쩍 붙는 말들이라니. 특히 11, 계룡산 도사님의 대사는 찰지고 강렬하다.
   “하여튼 요즘 젊은 것들은 유약해서 탈이야. 조그만 것도 지 힘으로는 하지를 못하고 부모에게 빌붙고……를 읽고 네가 앞으로 하게 될 일의 모든 결정은 너 스스로 하는 것임을 명심하도록 하여라.”까지 읽고 나면 도사님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호된 꾸중과 함께 가장 중요한 비기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자신에게 이렇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너는 한 번이라도 묘시에 일어나 오시에 태양의 정기를 받고 자시에 누운 적 있니?’
   ‘너는 한 번이라도 인생의 결정을 남의 시선이 아닌 네 마음의 소리만으로 내린 적이 있니?’       

 
 
합체

저자 박지리

출판 사계절

발매 2010.08.27.


2. 중급편: 맨홀

당신의 구멍은 무엇인가?’  

  소년은 아버지를 증오한다. 소년의 유일한 소원은 아버지가 죽는 것이다. 소년의 소원은 느닷없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아버지는 죽으면서 영웅으로 재탄생된다. ‘집을 불길 속 공포로 몰아넣은 악인과 죽음을 무릅쓰고 타인을 구한 소방 영웅, 그 간극안에서 소년은 죽도록 괴로워한다. 그런 소년과 달리 누나와 어머니는 아버지를 용서한다. ‘죽음이란 게 그 모든 기억과 증오를 다 앗아 갈 정도로 힘이 세다니.’ 소년은 끔찍했던 폭력의 기억을 몽땅 잊어버린 듯 행동하는 가족을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소년은 이렇게 읊조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가족이 아니었다. (...) 나는 이제 정말로 저 두 사람과 분리돼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소년은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변화하지 못했다. 아니, 변화하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은 혼자 말한다.
  ‘그래, 나는 언젠가 내가 살인자가 될 거라는 것을 늘 예감하고 있었어.’
  소설의 후반부, 재판 장면을 읽으며 나는 무릎을 쳤다. 그렇구나. 작가는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소설의 서사를 여기까지 몰아온 거구나. ‘화장터의 시스템과 별반 다들 게 없는 경찰의 행정절차를 거쳐 사건을 재현하고 문득 아버지를 죽여서 이곳에 갇힌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으로 파란색 죄수복을 순순히 받아들인 걸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이 그토록 증오한 아버지 덕분에 죗값을 덜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 간절히 소년이 원한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소년은 죽은 아버지가 자신을 죄의 구덩이에서 꺼내주기 바라며 고개 숙여 반성하는 척을 한다. 그로 인해 소년은 어둡고 깊은 맨홀에서 자기 영혼을 꺼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스스로 포기한다.
  소설 속에는 무수히 많은 구멍들이 등장한다. ‘실제론 존재하지만 법적으론 존재하지 않는 그런 애매한 구멍에 끼어 있는 처지인 이주 노동자들, 온갖 쓰레기들이 버려지는 하천, 유령 같은 엄마의 맥이 빠진 얼굴, ‘턱을 넘을 때마다 엉덩이가 반 정도 공중에 떠서 흔들거리는’ ‘관계의 맨 끄트머리’, ‘침대에 디딘 발만 든다면금방 마주할 수 있는 죽음,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쳐 숨은 아파트 지하 창고, 그리고 누나와 내가 발견한 피난처 맨홀까지.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구멍은 바로 소년의 마음에 뻥 뚫린, 내면의 상처이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나의 구멍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구멍은 무엇인가. ‘유일무이한 어둠을 기다리며 바로 피부 밑에서 숨을 죽인 채 웅크리고 있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은 무엇인가. 용기를 내 고백하자면 나 또한 삶의 무수한 구멍에 수도 없이 빠져 허우적댔다. 그 순간마다 용기 있게 자신을 직시하고 내 영혼이 다치지 않는 방식으로 현실에 맞서 싸웠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래서 나는 소년을 직접 만나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다고. 누구도 매순간 용감할 수는 없다고. 안녕이라고 말하지 말고 미안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실은 우리 모두 구멍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 구멍을 메워줄 타인을 찾아 헤매는 거라고. 너에게도 그런 타인이 꼭 찾아올 거라고. 조금만 더 버티고 기다리라고.    

 
 
맨홀

저자 박지리

출판 사계절출판사

발매 2012.07.27.


3. 고급편: 양춘단 대학 탐방기

분명, 본 적 있지만 실은 본 적 없는

  사설 아카데미 학원에서 문학과 철학을 결합한 수업을 듣고 한 선생님의 강의에 매료된 적이 있다. 아도르노를 전공한 선생님은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우리는 보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신체에는 분명 눈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시각이 있지만 세상과 타인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 말을 듣고 뜨끔했던 기억이 있다. 추운 겨울에도 곱은 손으로 폐지를 줍는 할머니, 계속된 야근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비원 아저씨,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노동자, 억울하게 죽어간 뺑소니 피해자, 고객을 위해 바닥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백화점 직원 등등. 분명 내가 봤지만 내가 무심히 지나친 사람들, 내가 투명인간 취급한 존재들, 내게서 끊임없이 배제되었던 존재들…….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뜨끔했다. 무수한 갑에 짓눌린 청소 용역 업체 직원들의 파업 투쟁에, 부당한 대우를 참고 또 참다가 결국 자살한 시간 강사 이야기에, 부당한 공권력에 쓰러지고 짓밟힌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에 나는 무수히 눈을 감았으니까. 아니, 분명 보고 들었지만 못 본 척 했고 못 들은 척 했으니까. 아니, 못 본 척 하고 싶고 못 들은 척 하고 싶었던 적이 있었으니까.
  작가는 이 부조리한 일들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양춘단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양춘단은 가방끈이 긴 시간 강사도 아니고, 대학물을 먹은 지식인도 아니고, 파업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직원도 아니다. 양춘단은 그저 밥을 굶는 사람이 있으면 밥을 먹여야 하는 사람이다.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건강한 육체를 타고났다. 대학에서 청소하는 일을 대학에 들어갔다고 자랑할 만큼 순수하다. 그리고 양춘단은 그 누구보다도 강인하다. 야간조로 보내겠다는 소장의 협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정도로 멘탈이 세다. 그리고 양춘단과 남편 영일은 생명의 힘을 안다. 암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영일에게 닭터는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던가. 영일은 투병을 위해 고향을 등지고 도시 생활을 하며 깨닫는다. ‘돌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자신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던 그 생명들이 오히려 자신을 살게해주었다는 것을.
  생활(生活)이라는 단어에는 살릴 화자가 들어간다. 삶이란 살리는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나를 살리고 그 힘으로 남을 살리는 여정이다. 촌부에 불과한 양춘단도, 평생 농사만 지었던 영일도 그 진리를 알고 있다. 그런데 도시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진리를 매순간 모르는 척한다. 도시는 남을 밟고 올라서는 일에 열을 올리도록, 그게 생존이라고 인식하도록 우리를 몰아댄다. 우리는 그 핑계 뒤에 얼굴을 숨기기 바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양춘단이라는 사실은 작가의 탁월한 한 수이다. 아니, 다시 말해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이 양춘단이어서 좋았다. 독자로서 행복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오렌지색 가방을 메고 다니는, 이 정겹고 인정 넘치는 할머니를 만나는 내내 나는 위로받았다. “, 할머니 저는 분명 할머니 같은 분을 본 적은 있지만 실은 본 적이 없다는 듯이…….” 내가 우물쭈물 입을 열면 할머니는 이렇게 말해주실 것만 같다.
  “아따, 괜찮소. 괜찮다니께요.”        

 
 
양춘단 대학 탐방기

저자 박지리

출판 사계절

발매 2014.02.21.


4. 박지리 작가의 비기 탐구

  세 권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줄곧 궁금했다. 이 작가의 비기는 무엇일까. 독자를 홀리는 작가의 매력은 무엇일까.
  『합★체를 읽으며 나는 의심했다. 박지리 작가는 쌍둥이가 아닐까? 합과 체의 성격이 나와 쌍둥이 동생이랑 비슷한 구석이 꽤 있는데? 맨홀을 읽으며 나는 또 의심했다. 작가의 성별이 진짜 여자가 맞을까? 남자 주인공의 심리를 이토록 처절하게 파헤치는데?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으며 마지막으로 의심했다. 작가의 나이가……,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이 구수하고 찰진 전라도 사투리를 맛있게 쓰는 할머니를 생생하게 구현하려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넘친다. 겹치는 비기가 없다. 작가의 다음 책이 곧 나온단다. 비기 찾는 일은 그 책을 읽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다. 그 책을 읽어도 비기를 찾지 못할 수도 있지만.


세 권을 다 읽고도 겹치는 비기가 없이 작품마다 다른 매력이 넘친다니……. 탁경은 작가의 박지리 입문기를 보니 세 권 모두 읽고 싶어지네요. 박지리 입문기는 여기서 마칠게요. 이번에 박지리 작가의 신작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이 나왔으니, 박지리 응용편은 여러분이 완성해 주시리라 믿어요~~~!

 
 
다윈 영의 악의 기원

저자 박지리

출판 사계절

발매 2016.09.20.

[책 소개]
인간 진화에 관한 미싱 링크를 찾아서 
분명 모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데, 아무도 서로의 내면에 그런 인간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인간. 모두의 인간이면서, 오직 나 하나만의 인간!”

합체』 『맨홀』 『양춘단 대학 탐방기로 작가만의 독특한 개성을 보여주고 있는 박지리의 신작. 이번 작품은 배경도 주인공도 한국이 아니지만 작가가 구축해 낸 세계, 캐릭터, 그들의 삶을 위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숙명적인 사건들까지 너무나 견고하고 탄탄해서 3천매나 되는 분량이 무색할 정도로 속도감 있게 읽힌다. 완전히 새롭고 낯선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비현실적이지 않고, 계급사회로 회귀한 미래를 보는 것처럼 삭막하게 느껴지다가도 고풍스러운 배경과 캐릭터들의 우아한 분위기 덕에 클래식 한편을 읽는 듯 아련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또한 한 인물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정은 치밀하게 짠 범죄추리소설처럼 시종일관 긴장감을 자아낸다. 제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나기 힘든 가족이라는 굴레, 필연적으로 저지르게 되는 살인의 문제와 법의 효용, 그를 둘러싼 부자간의 숭고한 사랑 등 3대에 이어 걸쳐지는 가혹한 운명의 수레바퀴는 인간이 가진 악의 본질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