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법, 사랑하는 법 : 김경희

제3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대상
김경희

 
 
사랑하는 사람이 예고된 죽음을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은 가슴을 짓이기는 것처럼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럽게 영영 떠나버리는 것은 그 준비 없음 때문에 남겨진 자들에게 더욱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이별의 방식이다, 적어도 내게는. 

내가 죽음의 무표정하고 딱딱한 얼굴을 처음으로 본 것은 10살이 되던 해 겨울이었다. 작은 아버지댁에 다니러 가셨던 할머니가 며칠 만에 앰블런스에 실려 돌아오시고 자리에서 일어나시질 못했다. 방 두 칸과 좁은 부엌이 전부인 조그만 집에 삼촌, 고모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잠자리가 부족해서 언니와 내가 근처 7촌 아저씨 댁에서 잠을 자던 날이었다. 새벽에 급하게 깨워진 언니와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 할머니는 돌아가신 후였다. 이미 죽음의 무표정하고 딱딱한 얼굴이 씌워져 있는 할머니의 얼굴. 몇 시간 전에는 ‘할머니’라고 불렀으나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는 존재가 내 앞에 누워 있었다. 사랑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프다기보다 무섭고 소름이 끼쳐서 어린 마음에도 나는 당황스러웠다. 그 후로도 한 동안 나는 대낮에도 할머니의 시신이 누워 있던 방에 혼자 들어가지 못했고 할머니의 영정사진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 무서움은 망자가 정을 떼기 위해서 남겨진 자들에게 주고 가는 것이라고 엄마는 말했지만 너무 어렸던 나는 그렇게 제대로 눈물 한 방울 흘려보지 못한 채 갑작스럽게 할머니를 떠나보냈다. 커가는 동안 할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할머니에게 못 다한 말들과 일들, 그리고 채 흘려보지 못한 눈물들이 내 가슴에 고여 있다가 가끔씩 아프게 일렁거렸다.

영원히 나와 함께 할 것 같았던 할머니의 죽음과 함께 나를 둘러싸고 있던 유아적 세계의 영원성 또한 나를 떠나갔다. 아무도 다치거나 사라지지 않고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내 세계도 부서지고 무너지거나 사라질 수 있다는 그 아리고 날카로운 깨달음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것은 그렇게도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으로 배운 것 같다. 

서른의 문턱을 넘어서는 동안 나는 몇 번의 죽음들을 보고 겪었지만 항상 죽음은 내가 준비할 틈을 주지 않은 채 닥쳐왔고 그렇기에 가슴 절절한 아쉬움과 슬픔, 때늦은 후회를 남기곤 했다. 같은 강의실에서 수업을 듣던 선배 두 명의 돌연한 죽음이 그러했고 대학졸업반 무렵 갑자기 닥쳐온 아버지의 죽음이 그러했다. 며칠 만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나는 아버지가 건강하게 살아계신 시간을 단 한 시간만이라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한 시간과 내 생애의 10년을 맞바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무뚝뚝하기만 한 딸이었던 내가 귀가한 후 아버지에게 살갑게 인사를 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산책을 나갈 수 있는 단 한 시간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더라면……. 하지만 그 한 시간은 내게 결코 되돌아올 수 없는 시간이었다. 

내 마음이 책 속에서 오브 아저씨에게 먼저 가 닿았던 것은 아마 이런 경험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알아볼 수 있는 맑은 눈과 속 깊은 마음씨를 지닌 어른스러운 소녀 서머나 사진을 수집하는 괴짜 클리터스와 같은 매력적인 인물들보다도 실의에 빠진 이 늙은 사내에게 나는 마음이 더 끌렸던 것이다. 물론 오브 아저씨보다도 더 어른스러운 서머에게도 메이 아줌마의 죽음은 커다란 그리움과 공허감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생을 같이 살아온 일생의 반려자였을 뿐 아니라 창조적 영감의 원천이자 삶의 근거였던 부인이 자신이 가꾸던 밭에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을 때, 제대로 된 인사말조차 하지 못하고 자신의 부인을 떠나보냈을 때 바람개비를 만드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이 늙은 사내의 심정이 어떠했을지, 그가 겪은 정신적 공황상태가 어떤 것이었을지 나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과 다시 한 번 만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 그 사람과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간절한 마음만은 비록 조금이긴 하지만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그러했던 적들이 있었기 때문에. 

메이 아줌마의 영혼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꿈에 부푼 오브 아저씨는 돌아오는 길에 주 의사당을 방문할 꿈에 부푼 클리터스, 그리고 뭔가에 희망을 걸기에는 두려움이 너무 크고 현실적인 서머와 함께 심령교회의 미리엄 B. 영 목사를 찾아간다. 하지만 결국 서머의 불길한 예상대로 여행의 끝에서 그들은 영 목사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만을 맛본다. 이전보다 더 큰 절망과 실의에 잠긴 오브 아저씨는 다른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차를 집으로 돌린다. 주 의사당을 방문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인 클리터스의 소망이 짓밟히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오브 아저씨는 다시 차를 돌려서 주 의사당 방문 일정을 진행한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도대체 그 순간 무엇이 그의 마음을 뒤바꾼 것일까? 무엇이 이 ‘살아갈 의지를 잃은 노인’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주었을까? 서머는 그저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그 순간 오브 아저씨는 자신의 곁에 남아 있는 서머나 클리터스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떠나버린 메이 아줌마는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의 곁에 남아 있는 그 아이들을 꼭 붙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메이 아줌마 영혼의 목소리가 하는 말을 결국 그가 들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가려는 것들을 꼭 붙잡으라고.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도록 태어났으니 서로를 꼭 붙들라고. 우리는 모두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니까.’ 어느 시인의 표현대로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어디 있을까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계속 살아가는 것은 어찌 보면 기적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그 사랑이 없으면 한시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메이 아줌마를 잃어버렸던 오브 아저씨의 상태처럼. 하지만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현명한 사람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정작 나만해도 항상 상실하기 전에는 그 대상의 가치를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인 것이다. 할머니의 경우에는 어려서 그랬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는 내가 아버지를 그토록 사랑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슬프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내 인생에서 아버지는 그저 원망과 미움, 혹은 무관심의 대상인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 2년차인 나는 ‘사랑’이 결혼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상처투성이로 누추해지는지를 가끔 경험한다. 사소한 일로 언성을 높이며 남편과 싸울 때마다, 그리고 서로 가능한 상대방에게 더 크게 상처를 주기 위해 애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아직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어리석은 나와 달리,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메이 아줌마나 오브 아저씨, 서머, 클리터스, 클리터스의 부모 같은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기에 가진 우리들의 부족함들을 사랑으로 채울 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현명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랑’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알고 무엇보다도 그 ‘사랑’으로 뒷받침된 자긍심을 지닌 사람들인 것이다. 이 때문에 딥 워터의 이동식 트레일러는 천국이 되고―비록 전세이긴 하지만 아담한 우리 집이 가끔 지옥이 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들 또한 ‘단순히 폐광지역에 사는 생활보호대상자’가 아니라 ‘햇빛 속에 굳건히 서서 눈부시게 빛나는 장엄하고도 우아한 존재’가 된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사람이기 때문에 오브 아저씨, 그는 결국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언제쯤이 되어야 이 소설속의 인물들처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될까. 그저 이들이 부러울 따름이다. 나는 오늘 또 술을 마시고 새벽 늦게 들어오는 남편과 싸움을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내 사랑의 누추함에 실망하고 후회를 하게 되겠지. 어느 CF 광고 속의 부인처럼 ‘여보, 우리 싸우지 말자. 사랑하면서 살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라는 메모를 남길 만큼 살갑고 따뜻한 사람도 되지 못하는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삶과 죽음, ‘그래도 우리는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되돌아보았던 시간들이 그리워질 것이다. 이 그리움이 지속되는 한, 내게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