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단요 작가 인터뷰

우리는 지금 도대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 걸까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 작가 인터뷰 | 단요
 

사람들의 머리 위에 수레바퀴 모양의 원판이 떠 있다. 수레바퀴는 정의를 상징하는 청색과 부덕을 상징하는 적색 영역으로 이분된다. 모두가 볼 수 있고, 과학으로 검증 불가능한 원판은 삶의 행적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하고, 이는 천국과 지옥에 갈 확률로도 이어진다. 르포 작가 ‘나’는 수레바퀴가 출현한 지 1년이 되는 시점에 다양한 사람들을 취재하면서 바뀐 세상에 대해 기록한다. 그것이 바로 이 소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이다. 초월적인 존재인 수레바퀴가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정의를 사람들에게 강요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검증하는 일종의 사고실험이다. ‘세계’라는 거대한 장치 안에 도덕성과 합리성의 관계를 놓고 독자들을 초대해 완성한 단요 유니버스는 페이크 르포임에도 섬뜩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제3회 박지리문학상 수상작으로, 첫 책 《다이브》를 시작으로 문윤성 SF 장편 대상을 받은 《개의 설계사》에 이어 당찬 행보를 이어가는 단요 작가의 또 하나의 문제작이다.



2022년도에 《다이브》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1년 좀 넘는 시간 동안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까지 무려 4권의 책을 연달아 출간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웃음)
 
오히려 신인이다 보니 템포를 올리기가 용이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달리기를 할 때, 초반에는 속도를 올리지만 후반 구간에서는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처럼요. 작가로서의 업은 단거리보다는 마라톤에 가깝다 보니, 이 책이 속도를 조절하는 기점이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잘해내야겠지요.
 

올해 초 박지리문학상 수상 소식을 전할 때 담담하게 문윤성 SF 문학상 대상 수상 소식을 전날 연락받았다고 대답하셨지요? 수상을 미리 예상하셨는지요? 또 동시에 2관왕이 된 기분은 어떤가요?
 
우선은 ‘이렇게 됐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고, 안도감도 조금 있었습니다. 첫 책 《다이브》를 출간할 때 작가 소개란이 너무 휑해서, 담당 PD님께 1년 안에 문학상을 두 개는 받아야겠다고 말씀드렸었거든요. 허장성세로 끝나는 대신 다짐대로 되었으니 다행일 따름입니다.
 


수레바퀴는 디코럼(적정률)이 말해주는 것처럼 각자의 직분과 영향력에 따라 비율이 달라지잖아요. 사이코패시나 폭력 성향의 사람들은 기본만 잘 지켜도 가점이 되고요. 수레바퀴에 이런 상대적인 판단을 부여한 것은 어떤 이유인지요?
 
말씀 주신 것처럼 수레바퀴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유연함을 보입니다. 하나는 사람의 처지와 능력에 따라 다른 점수를 매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점수에 대한 최종적인 계산이 ‘확률’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납득이 쉽습니다. 국회의원이 할 수 있는 일과 청소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다르고, 건강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만성 질환자가 할 수 있는 일도 다르니까요. 만약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채점 기준을 부과한다면 그건 정의가 아니라 엄청난 불공정일 것입니다.
다만 후자는 악질적으로 읽힐 여지가 많고,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럴 것입니다. 죽을 때 단 한 번 수레바퀴를 돌려서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것은 그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도박일테니까요. 선행을 많이 쌓은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수레바퀴의 청색 비중이 95퍼센트, 적색 비중이 5퍼센트라면, 이 사람은 죽을 때 5퍼센트의 확률로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20번 중 한 번은 그런 일이 일어나고, 전 세계에는 80억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겠죠.
그리고 이 ‘안심할 수 없음’이야말로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를 성립시키는 요소입니다. 예컨대 청색과 적색의 비중에 따라 연옥의 구성요소가 조절되는 세계라면, 사람들은 청색 비중을 80퍼센트까지 높이는 것만으로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평균치인 65퍼센트에 만족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안심할 수 없다면 99퍼센트의 청색 비중을 가진 사람조차 100퍼센트를 얻어내려 애쓸 것입니다.
즉 작중의 사람들이 안심하는 대신 치열하게 문제에 맞서기 위해서는, 거기에 따라 세계의 각 요소들이 새로운 형태로 배열되기 위해서는 그 불안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건 수레바퀴의 의지이기도 하겠지요(안심하지 말고 계속 두려워하고 노력하라는).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의 수레바퀴가 작가님 머리 위에 있다면 청색 비율이 얼마 정도 될 것 같으셔요? (웃음)
 
사람들은 보통 자기객관화에 어려움을 겪고, 그건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긍정적인 편향을 경계하다 보면 과도하게 부정적인 관점을 지니게 되고, 그렇다고 해서 경계하지 않으면 너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게 되지요. 그렇다 보니 제 수레바퀴가 어느 정도일까 예상해보진 않았고요, 다만 어떤 성적표가 나오든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다만 (정말로 수레바퀴가 나타난다면) 그 후에는 작중의 화자처럼, 각각의 사람들이 수레바퀴에 대응하는 모습을 살피며 르포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색 영역을 올리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을 듯하고요. 굳이 가외의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수레바퀴가 평균치에만 근접하기만 하면 65퍼센트의 확률로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65퍼센트라면 걸어볼 만한 도박이지요. 이렇게 말하면 수레바퀴가 싫어하겠지만요.
 

그렇다면 작품 속 인터뷰어 ‘나’는 작가님의 실제 모습에 많이 부합하는 편인가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묘하게 얄미운 질문’을 던져서 인터뷰이들을 언짢게 만든다거나 하는 면모는 제 성격을 조금 닮았습니다. 예를 들면 작중에는 P라는 수학과 교수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수레바퀴가 요구하는 정의’를 중심으로 재편되어가는 세상에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명히 정의나 윤리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세상을 받아들이면 놓치는 부분이 생기게 됩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명화나 브루크너 교향곡 음반은 아름답지만 도덕과는 큰 관련이 없어 보이지요(그리고 만약 환경오염을 고려한다면, 어떤 종류의 예술이나 문화산업은 악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특정한 종류의 순수학문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 인터뷰어 ‘나’는 그 사실
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만의 의문도 솔직하게 털어놓지요.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스럽지만, 순수수학은 원래 관심도가 떨어지는 분야 아니었나요? 뭐랄까,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본문 117~118쪽)
 
그게 논리적으로 틀린 말이 아닐지라도, 보통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분위기를 망칩니다. 물론 저는 분위기를 망치거나 친구를 잃는 상황은 피하고 싶기 때문에 말조심을 하지만, 가끔은 쓸데없이 솔직한 질문을 하고 싶어지지요. 한편 이런 성격은 현실에서는 큰 쓸모가 없지만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꽤 유용하지요. 슬랩스틱 코미디의 주인공과 같이 다니는 건 싫어도, 그걸 화면 너머로 구경하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니까요.
 

인터뷰어의 입장으로 본다면 누구와의 인터뷰가 가장 마음에 남는지요?
 
아무래도 3장 막바지의 D에 대한 인터뷰입니다. D는 34세의 수의사로, 청색 영역이 9할이 넘었다가 하루아침에 0 아래로 곤두박질친 인물이지요. 0 아래라는 것은, 완벽한 적색 아래에 또 다른 단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흑색입니다. 어떤 선행을 해도 구제불능이며 천국에 갈 가망이 없다는 선고가 내려진 셈입니다.
그렇다면 D는 왜 이런 처분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런 논리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입니다. ‘수레바퀴 시스템하에서는, 지옥은 어느 정도 확정적이지만 천국은 아니다. 선한 삶이 살인의 변명이 될 수 없듯이, 청색 비중이 높던 사람조차도 한 번의 실수로 상당한 점수를 잃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점수를 복구하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청색 영역이 100퍼센트에 가까운 사람들을 지금 당장 죽이는 것이야말로 좋은 일이 아닐까? 그들이 천국에 갈 확률은 지금이 가장 높을 테니까? 천국에서 영생할 수 있다면 지상에서의 20년은 별것도 아닐 테니까?’
그래서 D는 세 명의 사람을 죽이고, 수레바퀴에게서 구제불능 판정을 얻어냅니다. 그리고 인터뷰어 ‘나’와 대화하며 자신의 논리와 그에 따른 계획을 펼쳐나가지요. 모든 사람들이 수레바퀴에게서 해방되는 계획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라면 D는 이상한 논리를 설파하는 살인마겠지만,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의 세계는 말 그대로 ‘바뀌어’ 있고, D의 논리는 이
상하면서도 흥미로울 것입니다.
 

폭염, 폭우, 산불 등 최근 우리 현실에 나타나는 극한기후의 재앙을 보면 정말 수레바퀴 같은 강력한 장치가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작가님은 수레바퀴에 찬성하는 쪽인가요 아니면 반대하는 쪽인지요?
 
답변드리기에 앞서 수레바퀴의 특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우선 수레바퀴는 업보의 총합과 그 예상 가능한 결과(천국 혹은 지옥의 확률)를 보여주면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행동을 유도하는 도구입니다. 최종적인 관건은 행위자 개개인의 자발성과 수용일 수밖에 없지요. 3장에 등장하는 J처럼, ‘쾌락주의자임을 자인하며’, ‘새빨간 수레바퀴를 뽐내고’, ‘자신이 지옥에 갈 것임을 받아들이는’ 부류의 악인에게는 별다른 구속력이 없는 셈입니다.
한편 수레바퀴는 종교적이고 영적인 특성이 강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의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합당과 부당을 따질 수도 없이 그저 순응하게 되고요. 따라서 수레바퀴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마겟돈에 반대한다’나 ‘윤회에 반대한다’와 같은 주장일지도 모릅니다.
달리 말하면, 종교적이고 초월적인 존재가 인간을 통치하는 것과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들을 통치하는 것은 매우 다른 일입니다. 작중의 수레바퀴가 그 강압성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느슨한 구속력만을 지니는데도 인류를 통솔할 수 있는 것은 그 초월적인 측면 덕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이러한 도구를 만들어 서로에게 씌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걸 시도하는 주체에게 항의와 불만이 빗발칠 테고, 도리어 극단적인 폭력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제대로 된 집계도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수레바퀴를 시도할 자원과 비용으로 다른 일을 하는 편이 더 낫겠지요.
즉 저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완벽한 수레바퀴가 존재한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지만, 그런 것을 구현하고 모두를 동의시킬 만한 사람이 인간 중에 있으리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조건하에서의 찬성이니 현실적으로는 반대에 더 가까운 입장이겠네요.
 

소설의 인물들이 펼쳐 보이는 윤리학, 정치철학적 입장과 함의는 지금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조목조목 짚고 있습니다. 다양하고 방대한 참고자료를 활용하셨는데 평소에 이런 공부를 많이 하시는지요?
 
제3세계에서의 노동 착취나 환경오염 같은 사안에서, 기업의 비윤리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으면 “회사가 자선단체냐? 회사의 목적은 이윤 추구다. 회사는 합리적으로 행동했을 뿐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구도에서 볼 수 있다시피 도덕성과 합리성은 종종 대립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런데 도덕성이 언제나 합리성과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합리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양심의 가책을 피하려는 것이든, 타인의 비난을 피하려는 것이든 간에 도덕적 동기는 결국 이기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따라서 도덕성은 합리성의 문제다’라는 주장 또한 있지요. 참,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도구적 합리성(instrumental rationality), 즉 자기 이익의 극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일관적이고 타당한 전략을 수립하려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어쨌거나 도덕성과 합리성은 묘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에 따라 둘의 관계는 오래도록 고찰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윤리학과 경제학》이라는
저술을 통해 두 학문 분과의 접점을 찾고, 고티에나 하사니 같은 철학자들은 도덕적 선택을 합리적 선택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세계는 이렇게 바뀐다》가 묘사하는 세계 또한 이러한 테마의 연장선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 정의로운 일이 타산과 자기 이익에 직결된다면, 그리고 그 연결고리가 ‘초현실적인 방법으로’ 실증된다면, 아직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덕분에 전 지구적 위기와 관련한 다양한 문제들을 비교적 쉽게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페이크 르포라는 형식을 취한 것도 이런 것과 관련이 있는 건지요?
 
작중에서 소개되는 논점들은 몹시도 많기 때문에, 또한 사람마다 경중을 받아들이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그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판단은 제시하지 않으려 합니다. 다만 합리성과 도덕성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리고 정의를 위한 합리적인 전략과 그 방법들에 대해서는 한 번쯤 숙고해볼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계를 하나의 기계 장치로 간주한 다음, A라는 상태를 구현하려면 어떤 조작이 필요할지, 그 실질적인 비용은 어떨지… 등을 고민해보는 것입니다. 이때 르포는 ‘세계를 하나의 기계 장치로 간주’하기에 좋은 포맷이지요.
 

박지리 작가의 작품들을 읽어본 적 있는지요?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 있다면?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하위 계급과 상위 계급의 거주지역이 나뉜 디스토피아 세계를 무대로 한 장편소설이지요. 이런 세계를 무대로 삼은 소설들은 곧잘 도식적인 계급 대립만을 다룹니다만(그에 따라 단선적인 권선징악이 나타나고요),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은 그러한 도식을 탈피하고 악의 복잡한 측면과 그 구성요소들을 묘파했다는 데에서 단순한 영어덜트 소설 이상의 아우라를―즉, 모든 세대를 설득할 만한 소구력을―지닌 듯합니다.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한말씀 해주신다면?
 
현실의 다양한 문제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글이다 보니 다양한 감상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온전히 즐거울 수는 없겠고 씁쓸한 부분도 있겠지만, 그 모든 감상을 합해 흥미로운 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여기에 담긴 사고실험이 깊은 고민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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