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필름 #02. 그림책 작가 김상근

영상과 인터뷰로 작가를 더 가까이, 깊게 만나 보는 시간.
'작가필름'의 두 번째 주인공은 지금 가장 주목받는 그림책 작가 김상근입니다.

 


김상근 작가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수줍어 하는 것 같으면서도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말하고, 종종 말이 없다가도 문득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밉니다. <두더지의 고민>에 이은 두 번째 이야기, <두더지의 소원>과 함께, 오랜만에 김상근 작가를 마주했습니다.




오늘 기분이 어때요?


좋아요. 사실 오늘 오후에 눈이나 비가 온다고 했거든요. 오후 12시에서 5시 사이에요. 오늘이 인터뷰 날이니까 이따가 눈 오면 정말 좋겠다, 생각하면서 왔는데 날씨가 좋네요. <두더지의 소원> 인쇄감리 날 파주에 눈이 엄청 왔어요. 눈 오면 인쇄가 잘 안 나온다고 해서 걱정했거든요. 그래도 눈이 펑펑 오니까 환상 속 공간으로 가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내가 그린 책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 지금이 그런 기분이라고 할게요. 

 

김상근 작가가 굉장히 나이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이 의외로 많아요. 

맞아요. 강의 가면 할아버지가 올 줄 알았는데 젊은 아저씨가 왔다고. 나이가 몇 살이냐는 질문을 항상 받아요.

 

왜 그런 것 같아요? 

그러게요. 나름 밝고 아기자기하게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는데.(웃음) ‘작가’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요. 제 책의 분위기가 좀 그런가 봐요.

 

원래 인터뷰를 꺼려했잖아요. 농담처럼 신비주의라고도 했었고요. 

네. 아직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림책을 많이 낸 것도 아니고 이제 시작하는 단계인데, 인터뷰가 낯선 느낌? 그리고 작품으로만 봐 주셨으면 좋겠는데, 작가의 얼굴을 보거나 말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작품에 대한 선입견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담당 편집자 분이 제 얼굴이 이미 페이스 북이나 여기저기 다 나온다고. 무슨 신비주의냐고 하셔가지고. (웃음)

 

책의 분위기와 김상근 작가 실제 모습이랑 어긋나는 느낌은 아닌 것 같아요. 

두더지 닮았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진짜 그런가 하고 <두더지의 고민> 나왔을 때 두더지 얼굴에 안경을 이렇게 대놓고 보니까, 저같은 거예요. “나랑 똑같이 생겼네?” 그랬어요. 




<두더지의 소원>은 슬픈 이야기가 아닌데 슬프다는 사람이 많아요. 저도 눈물이 났어요. 


아련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슬프다는 생각은 사실 못했어요. 중간에 버스를 태워주지 않은 게 두더지한테 상처였을 수는 있는데 그 뒤에 사슴 아저씨랑 할머니가 따뜻하게 토닥여주잖아요. 그래서 마지막에 곰 친구가 찾아왔을 때 두더지가 신나게 따라나가면서 두근거리는 느낌? 그 정도로 책을 덮을 줄 알았어요.  sns에 슬프다고 평을 남겨 주신 분들도 많더라고요. 느끼는 지점들이 다 다른 것 같아요. 

 

열린 결말인 건 알지만, 작가가 생각하는 결말이 혹시 따로 있을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눈 친구 옆에 발자국이랑 눈을 만졌던 흔적 같은 걸 남겨 놨어요. 눈 친구가 진짜 두더지를 보러 돌아온 건지, 누군가가 만든 건지… 보시는 분들이 자연스럽게 상상하면서 책을 덮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별똥별이 소원을 들어준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두더지는 아마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요. ‘내 소원이 진짜 이루어졌어!’라고요. 이 책을 본 아이들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할머니가 만들어줬구나.’ 그런 아이들도 많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웃음)

 

작업하면서 중간에 이야기가 여러 번 바뀌었죠?

많이 바뀌었죠. 사실은 편집부에 안 보여준 이야기들도 쫌 더 있어요. 두세 번은 완전히 큰 흐름을 바꾸었고요. 처음에는 큰 눈덩이 안에 조그만 돌멩이가 들어 있는 이야기였어요. 두더지가 눈덩이랑 같이 버스도 타고 싶고 집에 초대도 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다가, 나중에 눈이 녹아 그 안에서 돌멩이가 나오니까 돌멩이랑 같이 놀고 버스도 타는 그런 이야기였죠. 너무 소박한 것 같기도 하고. 특별한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이 시각적으로 확 느낄 수 있는 재미같은 것? 그리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이 부족하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중간에 눈덩이를 캐릭터 형상으로 바꾸었는데 그것도 해놓고 보니까 다른 그림책이 떠오르기도 하고…

 

다른 그림책이요? 

레이먼드 브릭스의 <눈사람 아저씨>가 생각난다고 어느 편집자 분이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아예 바꿨죠. 중간에 두더지가 길을 잃어서 곰 아저씨가 길을 가르쳐 주는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마침 배달가는 길인데 태워주마’ 하고. 자전거에 두더지랑 눈덩이를 태우고 가는 거예요. 이렇게 아이들의 세계를 인정해 주는 조력자가 나타나면 좋겠다 싶었어요. 그러면서 생각났던 게 할머니예요. 어렸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랑 한동안 같이 살았는데 그때 기억이 되게 큰 것 같아요. 그 기억들… 할아버지가 아프셔서 수술하고 집에 계시면 제가 할아버지를 업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그랬거든요. 

 

몇 살 때요?

고등학교, 대학교 때요. 할아버지가 생전에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손자 등에 업혀서 다녀 본 사람 나와 보라고. 요번에 작업할 때도 할머니가 아프셔서 할머니 생각 많이 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영향이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한창 <두더지의 소원>을 작업하던 겨울날, 할머니께 전화가 왔어요. 할머니가 제 번호로 직접 전화하신 건 처음이었어요.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할머니께서 "손주 보고 싶어서 전화했지."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제가 마감이라서 끝나면 바로 할머니 얼굴 뵈러 가겠다며 끊었는데 사흘 후에 거짓말처럼 할머니께서 의식이 없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할머니께서 무슨 예감이 있으셨던 걸까...' 의식 없는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붙잡고 서서 회의감과 슬픔에 잠겼던 것 같아요. 올 겨울엔 하늘에 별도 참 많아 작업하다 답답하면 나와서 별 보며 할머니 생각을 많이 했거든요. 물론 소원도 빌었죠. 정말 감사하게도 그 후로 차츰 좋아지셔서 완성된 책을 할머니께 읽어 드릴 수 있었습니다.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할머니는 괜찮으세요? 

네, 지금은 괜찮아지셔서 재활운동을 하고 계세요. 


애니메이션을 전공했는데 왜 그림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지금도 애니메이션 일은 하거든요. 작업을 크게는 안 하지만 기획 단계에서 캐릭터 디자인이나 배경디자인, 이런 것들은 가끔 일로 해요. 사실 2D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려야 해요. 애니메이션은 1초에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표현하려면 24장의 연속 동작이 필요한데요. 그 말은 비슷한 이미지를 24장을 그려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죠. 그러려면 그 작업의 효율을 찾기 위해 캐릭터도 더 단순하고 장식들도 더 간소화해야 하거든요. 머리카락의 결을 더 섬세히 그리고 싶어도 단순하게 타협하게 되죠. 졸업 후에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그 당시 떠오른 이야기가 <두더지의 고민>이었는데요. 애니메이션이 아닌 다른 매체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림책의 존재는 잘 몰랐는데요. 우연히 미국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갑자기 일이 하나 들어왔어요. 글이 있는데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겠느냐고요. 동물이 나오는 아동용 어플리케이션에 들어가는 이야기였는데요. 정말 즐겁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그때 같이 작업했던 분이 그림책에 대해 이야기해 줘서 찾아보게 되었고, 지금껏 그 매력에 빠져 있네요. 
 

몸이 정말 힘들었겠어요. 

네. 학교 편집실에서 야간 작업 하고, 의자 세 개 붙여놓고 맨날 자고 그랬는데. 그때 크게 느꼈던 건 ‘나는 애니메이팅보다는 한 장의 그림을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 거구나.’였어요. 이미지를 움직이는 건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판단을 했어요. 애니메이션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자! 그래서 영역이 조금 바뀌었죠. 애니메이션을 할 때도 저는 항상 제가 감독이고 싶었거든요. 애니메이션은 공동작업이 많아요. 혼자 하기 힘드니까. 그 안에서도 내 이야기로 친구들과 같이 하고 싶었고, 항상 내 것에 대한 마음이 강했어요.



그림책 작업 과정에 대해서 들려줄 수 있어요? 

처음에 연습장에다 조그맣게 썸네일을 많이 그려요. 애니메이션 할 때 습관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콘티도 많이 짜 보고. 어느 정도 정돈이 되면 더미북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넘겨 봐요.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의 느낌 확인하고. 그다음엔 컴퓨터에서 화면 구성하고 칼라도 넣어 봐요. 제가 고민이 많다 보니까 ‘이게 더 나았나? 아닌가?’ 하면서 수정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그렇게 조정한 다음에 파스텔이나 색연필로 수작업 해서 스캔 받고, 마지막으로 컴퓨터에서 색감이랑 세밀한 부분들을 보정해요.

 

보통 원화를 기준으로 인쇄하는데 디지털 데이터로 색을 판단해야 해서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제가 모니터로 작업했던 색깔을 딱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어서, 그 당시에 출력물 가지고 순간의 느낌으로 판단을 하거든요. 처음엔 인쇄 과정을 잘 모르기도 했고, 구현하기 힘든 색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겪은 건 아니라서요. 막상 책이랑 모니터랑 비교해 보면 또 다르고… 그건 어쩔 수 없구나 하고 지금은 받아들여요.

 

첫 책부터 지금까지 계속 동물들이 나오잖아요? 사람은 한 명도 안 나오고. 

가끔 편집자 만나면 그런 말 듣긴 하거든요. ‘사람을 못 그리세요?’(웃음) 사람을 못그려서 안 그리는 건가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딱히 그렇지는 않고, 환상적인 느낌을 좋아해요. 어릴 때 이솝우화 같은 걸 많이 봤거든요. 동물들이 자기들만의 세계 안에서 가방 메고, 신발 신고, 사람이 할 법한 이야기나 행동 같은 걸 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어딘가에 존재할 것만 같은 특별한 세계, 초대받고 싶은 세계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걸 그릴 때 좀 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영감을 주는 작가나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영상을 많이 접하고 자란 세대거든요.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티비에서도 맨날 보고. 좀 더 커서는 유럽 에니메이션을 좋아했어요. 예술영화도 좋아했고요. 러시아 작가 유리 노르시테인의 단편 애니메이션 <안개속의 고슴도치>를 좋아했고, 러시아 영화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도요. 워낙 길어서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데 영상미가 주는 충격이 멋지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영향을 받은 것 같고, 제 작업 스타일에 그런 것들이 남아 있나봐요.



요즘 관심사를 물어봐도 될까요? 

다음 그림책 생각을 제일 많이 해요.(웃음) 처음 그림 책 시작할 때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림책 열 권 내고, 책이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면 먹고살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열 권 내면 뭐라도 되어 있겠다 했는데. 그것도 옛말이고… 요즘은 꾸준히 책을 계속 내야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림책이 되게 힘들구나, 라는 걸 책 내고 알았어요. 

 

<두더지의 고민>에 이어 이번 책에서도 두더지는 친구가 없어요. 친구를 사귀고 싶은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누군가와 소통을 하고 싶다면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시간을 함께 보내며 감정을 나누느냐에 따라 관계가 깊어지기도 하고, 끝나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마음을 주고 싶거나 친해지고 싶은 대상을 발견하면 마음을 좀 더 표현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제가 마음을 주고 표현하면 상대방도 반응을 해서 함께 무언가를 해 볼 수 있는… 관계의 시작이 되니까요. 

 

남과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 익숙한 문화는 아니잖아요. 그런데 김상근 작가는 참 자연스러워요. 처음에는 외국에서 오래 살다왔나? 그랬어요. 

저는 고마우면 고맙다, 반가우면 반갑다. 이렇게 전하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이에요. 누굴 만나면 함께한 시간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그냥 말로만 인사하는 것보다는 손을 잡으면 마음이 더 잘 전해지는 것 같아요. 제가 소통하는 방식이에요. ‘진짜 고마웠어, 진짜 반가웠어’라고요.

 

참, 이걸 궁금해 하는 어린이가 있었어요. 두더지는 왜 바지만 입고 있나요? 

이게 더 예쁘기도 하고요. 음… 사실 할머니가 나오는 장면을 보면, 할머니가 두더지가 입을 윗도리를 짜고 있거든요. 윗도리는 현재 진행중입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