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밑줄 그은 구절 : 무엇을 향해 웃고 있는가, 그대들이여!

10월 21일 목요일 밤 나는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 들어섰다. 파가니니처럼 현란한 기교를 자랑하는 청년, 막심 벤게로프의 바이올린 연주 공연을 위해. 특히 그의 비에나프스키와 파가니니 연주는 일품이다.

공연 시작 10분 전, 자리에 앉아 공연 안내지를 꼼꼼히 읽어 가는데 갑자기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연주회장에서 자주 마주치는 유명 디자이너 ‘앙’(?)선생이 대여섯 사람들과 들어선 것이다. 그 일행은 무대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문제는 일행 중 앙선생만큼이나 유명한 여자 배우 한 명이 동참한 것이었다. 순식간에 수십 명의 여자들이 그 여배우한테 사인을 받겠다며 우르르 몰려들었다. 쉴 새 없이 휴대폰과 디지털 카메라의 조명을 터드리는 여자들. 마침 내 옆자리는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듯한 고등학교 여학생 셋이 있었다. 나란히 앉은 그들은 플라스틱 인형처럼 하나같이 여배우를 향해 눈길을 꽂은 채 조잘거렸다.

“우리도 싸인 받자.”
“그런데 쪽 팔린다. 앞자리까지 갈려니……”
“야! 우리가 000을 또 언제 보냐? 시작하기 전에 싸인 받자.”

결국 그들은 다른 여자들처럼 여배우의 싸인을 받아왔다. 흥분의 빛을 감추지 못하는 여학생들.
내가 물었다.

“싸인 받았니?”
“(감격의 웃음을 지으며)……네.”
“그렇게 좋아?”
“네. 너무 이뻐요. 얼굴도 작고, 하얗고…… 너무너무 이뻐요(침까지 흘릴 태세다).”
“너무 좋아서 어디 연주가 귀에 들어오겠어?”
“오늘 000 본 것만으로도 행복해요(연주 듣지 말고 그냥 집에 돌아가라 해도 괜찮다는 듯한 표정)."

나는 너무 씁쓸해 입을 다물었다.
 

청중들의 그치지 않는 앵콜 요청에 연주는 10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밖으로 나오니 또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앙선생과 여배우를 둘러싼 사람들의 무리가 막심 벤게로프의 싸인을 받기 위해 줄 서 있는 사람들까지 몰아낼 정도였다. 그들은 거의 여자들이었다. 여학생부터 중년 여자에 이르기까지 여배우의 작고 하얀 얼굴에 보내는 질투와 선망이 뒤섞인 복잡한 눈길! 부러움과 찬사와 자신들의 외모를 비난하는 소리가 뒤섞인 어지러운 혀! 그렇게 10월의 늦은밤, 예술의 전당은 우울하고 서글프게 소란스러웠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조수인 난쟁이 살라이.
그는 사막이나 북극 땅 한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을 정도로 교활하며, 게다가 주인의 물건들을 내다 파는 집안 도둑이다. 그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은 늘 그저 그렇다. 뭐 재밌는 일 좀 없을까. 이런!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살라이는 밀라노의 새 공작부인을 보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돈을 주고 키 큰 한 사내의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신약성서의 삭개오¹처럼! 그러자 루도비코 공작과 그의 어린 새 신부, 베아트리체가 눈에 들어왔다.
“에이, 키도 작고 얼굴도 까맣고 정말 못생겼잖아.”
어느 날, 루도비코 공작은 부인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에게 부탁한다. 그 바람에 살라이는 베아트리체와 자주 만남을 갖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살라이는 검은 얼굴빛의 베아트리체의 마음과 영혼에서 점점 환한 빛을 보게 된다. 베아트리체 역시 하급층인데다가 난쟁이인 살라이와 누구하고도 나누지 못한 교감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백하듯, 레오나르도와 살라이 앞에서 말한다.
 
 
내가 우리 언니처럼 금발 머리에 우아한 얼굴이라면, 사람들은 나의 내면까지 들여다보고 싶어하겠죠. 사람들은 이 칙칙한 포장지 안에서 화사한 색깔들을 발견할 거예요. 무지개가 가진 모든 색깔의 색조 하나하나까지 볼 줄 아는 눈과 류트의 음 하나하나를 들을 줄 아는 귀를 발견할 거예요. (69~70쪽)
 
 
하지만 베아트리체는 자신의 초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죽은 사내아이를 낳고는 곧 숨을 거둔다. 스물두 살, 검은 꽃 한 송이가 허공으로 사라지듯, 살라이는 한동안 상실감과 외로움, 대화를 나눌 벗을 잃은 답답함에 힘들어한다. 그러던 살라이는 자기 나름대로 ‘아름다운 심술’(?)을 부린다. 다른 귀족 부인들의 초상화를 레오나르도가 그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또 뭐람! 어느 날, 낯선 방문객이 찾아온다. 프란체스코 델 조콘다라는 상인과 그의 부인 리자 디 게라르디니. 상인은 레오나르도에게 부탁한다.
“제 아내, 모나²리자입니다. 초상화를 그려 주세요.”

살라이는 눈을 번쩍 뜬다. 리자라는 부인은 죽은 베아트리체와 너무도 닮은데다가 나이도 스물두 살이라니. 살라이는 직감하고, 결심한다.
‘선생님한테 저 부인의 초상화를 꼭 그려달라고 해야지. 아니, 꼭 그리시게 할 거야. 그럼 그 초상화는 완성되지 못한 베아트리체의 초상화가 될 거야!’
살라이는 상인의 부인을 슬쩍 쳐다보며 ‘베아트리체와 너무 닮았어.’ 하고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다.
 
 
이 여인은 자신이 예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한 사람이다. 이 여인은 자신을 인정함으로써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을 갖게 된 사람이다. 머릿속의 잣대로, 오직 자신의 잣대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듯한 표정의 여인, 기쁨을 주는 법과 고통을 주는 법을 아는 여인, 인내하는 법을 아는 여인, 무수한 겹으로 감싸인 여인. (162쪽)
 
 
‘모나리자.’
앞으로도 천 년을 그렇게 미소지으며 세상과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한 여자. 그런데 지금 우리는 누구를 향해 웃고 있는가? 돈, 권력, 미모, 명예? 자꾸 10월 하순의 늦은 밥, 예술의 전당에서 일어난 소란과 혼란이 떠오른다. 어느덧, 세상은 레오나르도와 살라이와 베아트리체 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듯 화려하게 타들어간다. 예술과 진정성과 내면의 아름다움 같은 것에는 머리 아파하며 밤이고 낮이고 마몬(Mammon)신³에게 절을 한다.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이제는 마치 전설처럼 되어 가는 모나리자의 이야기가 소중한 것이다.
 
 
1. 삭개오-성경에 나오는 교활한 세리로 난쟁이인 그는 마을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에 올라간다.
2. 모나-결혼한 여자를 가리키는 이탈리어로 여성에 대한 경칭이다.
3. 마몬신-성서에 나오는 ‘부(富)’의 신으로, 인간을 타락시키는 물욕(物慾)을 가리킨다.
 
 
 
글 · 노경실(동화작가, 소설가)
 
 
1318북리뷰 2004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