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일기 2011 l 내 꿈은 노반박사 : 서혜림

내가 쓰는 역사 일기 대회 2011 개인 부문 우수상
구미천생초등학교 5학년 서혜림
 
 
642년 5월 27일
어제 신라에 도착했다. 듣던 대로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은 화려했다. 벽에 금을 칠한 귀족들의 집이 수 십 채는 되었고, 길도 잘 닦여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숯으로 밥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신라에서는 밥 때마다 보이는 연기가 보이지 않았고 그을음도 없어서 거리가 깨끗했다. 내가 백제에서 먼 신라 땅까지 온 이유는 신라의 가장 큰 절인 황룡사에서 목탑을 짓는다고 우리 백제의 기술자들을 요청하였는데, 우리 아버지 ‘아비지’가 백제 기술자 총감독으로 정해졌다.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겨우 설득하여 따라올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박사 집안이다. 우리 할아버지도 백제의 미륵사 9층목탑을 짓는데 한 몫 하셨다. 신라 황룡사 9층목탑을 지으실 우리 아버지, 그리고 유명한 노반박사가 꿈인 나. 그래서인지 꼭 이번 공사에 아버지를 따라오고 싶었다. 이번 기회에 훌륭한 탑을 짓는 법도 공부하고, 아버지도 도와드리면 내 꿈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것 같다.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황룡사에 갔다. 탑 짓는 것을 지휘하시는 아버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궁금한 것은 여쭈어보고, 힘든 일은 거들어 드렸다. 기술자 아저씨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신라 예작부의 총감독인 김용춘 아저씨가 특별히 석빙고에서 얼음을 내왔다. 덕분에 모두가 시원한 얼음물을 먹을 수 있었다.

신라에서는 기술자들이 우리 백제보다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 같다. 백제에서는 여러 방면의 전문가를 박사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유교경전을 훤히 꿰고 있는 오경박사, 기와를 잘 만드는 와박사, 하늘을 관찰하여 해와 달이 움직이는 것을 연구하는 역박사, 의학을 연구하는 의학사, 불탑의 꼭대기를 만드는 노반박사 등이 있다. 하지만 여기 공사현장의 신라 기술자들은 우리보다 옷도 허름하고 밥도 쌀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을 수 없는 잡곡 투성이다. 
 
참! 오후에 김용춘 감독님의 아들인 김춘추와 친구 김유신이 탑을 짓는 현장에 왔다. 서먹했지만 오랜만에 내 또래 친구를 만나서 반가웠다. 내 이름을 묻고 먼 백제에서 온 것을 신기해하며 백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3년동안 머물 계획이라고 했더니 자주 들르겠다고 했다.
 
 
643년 8월 14일
가베가 얼마 남지 않았다. 모처럼 바깥구경을 하려고 돈을 조금 들고 시장으로 나왔더니 사람들이 득실득실하였다. 귀족들이 주로 찾는 명품 거리를 둘러보았다. 유리구슬로 만든 목걸이, 화려한 비단, 서역상인이 파는 공작새 깃털, 페르시아산 보석이 박힌 브로치, 금으로 만든 허리띠, 질 좋은 종이들을 진열해 놓고 판다. 시장은 신라인들과 외국인들이 뒤엉켜 몹시 붐볐다. 주령구라는 귀족들의 놀이 기구도 있었는데, 술을 마시면서 벌칙을 내릴 때 사용한다고 한다. 노래 한곡 부르기, 여러 사람이 코 때리기, 간지럼을 태워도 가만히 있기, 노래 없이 춤추기 같은 재미있는 벌칙이 14면에 적혀 있다. 근엄한 신라 귀족들이 이런 벌칙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너무 웃겨서 깔깔깔 웃었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달콤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따라가 보니 유밀과를 파는 가게가 보인다. 마침 배가 고파서 유밀과 한 개를 사 먹었다. 신라의 유밀과는 우리나라의 맛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시장거리를 걸어 다니다 보니 넓은 광장에서 노래대회를 하고 있었다. 1등에게는 궁중의 전속 가수가 될 수 있는 특권을 준다는데, 사람들이 엄청나게 줄을 서 있었다. 백제의 노래 <정읍사>, 군대 간 남편을 기다리는 내용의 <선운산가>, 메나리 노래라고는 하는 <산유화가>, 길쌈을 하면서 부르는 <희소곡>, <찬기파랑가>, 한 때 금지곡이었던 <서동요> 같은 노래들이 불리고 있었다. 고합을 빽빽 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멋들어지게 잘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1등은 이웃마을의 한 아저씨가 하셨다. 그 아저씨는 입이 귀에 걸린 채로 궁궐 출입증을 받고, 쌀 한가마니와 돼지를 받아가셨다. 나도 노래를 잘 하는데 15살이 넘어야 참가자격을 주기 때문에 조금 아쉬웠다.
 
다시 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아주 화려한 가위를 보았다.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인데 손잡이가 봉황새 꼬리모양이고, 그 안에 당초무늬가 새겨져있고, 당초무의 주변에는 물고기 비늘 모양 같은 점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금이 씌워져 있었다. 어머니께서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서 큰 맘먹고 하나 샀다. 그리고 그 옆 가게에는 예쁜 토우를 팔고 있었다. 여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 토우도 하나 샀다. 말을 탄 두 사람이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는 모습의 토우였다. 어머니와 여동생이 기뻐하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것 같았다.
 
 
644년 7월 11일
오늘 오전에는 왠지 모르게 어머니가 많이 보고 싶었다. 울적한 마음으로 공사장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한 쪽에서 탑에 올릴 기와를 굽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와를 빚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동그란 수막새를 빚고 있었는데 점점 어머니의 얼굴을 닮아가고 있었다. 기와를 빚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며 어흥! 하고 큰 소리를 내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더니, 춘추가 거기에 있었다. 덕분에 내 기와 한 쪽이 찌그러졌잖니. 에휴, 간 떨어질 뻔 했다. 춘추는 내가 기와 빚는 것을 지켜보더니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빚었다. 서로의 얼굴에 흙을 묻혀가며 신나게 놀았다. 사실 제대로 빚은 것보다 망친 것이 더 많았다. 기와를 빚는 아저씨께 한바탕 꾸지람을 듣고 나서야 우리는 서로 몸에 묻힌 흙을 씻으러 갔다.
 
 
644년 7월 12일
드디어 9층 목탑의 준공식이 오늘이다. 225척의 당당한 탑이 신라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을 만큼 높다. 각 변에 8개씩 기둥이 있고 가운데 찰주를 지탱해 주는 기둥까지 총 65개의 기둥으로 떠받쳐 있다. 오늘 준공식에는 선덕여왕님도 행차하시기로 되어 있다. 요란한 나발 소리와 함께 멀리 여왕님의 행렬이 대웅전을 지나 탑 앞의 마당에 이르렀다. 그 행렬의 중앙에는, 바로 선덕여왕님이 계셨다! 선덕여왕님은 듣던 대로 멋있으셨다. 선덕여왕님은 황룡사에 불공도 드릴 겸 황룡사 9층목탑 준공식에 행차하신 것이었다. 선덕여왕님과 내 눈이 마주치자 선덕여왕님께서는

 
 “네가 황룡사 9층목탑의 총감독인 아비지의 아들이냐? 듣던 대로 똘똘하게 생겼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인자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시는 선덕여왕님의 얼굴에 우리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더욱 집이 그리워졌다. 어머니도 보고 싶고, 매일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나를 잘 따르던 여동생도 보고 싶고, 매일 내 방을 정리해주며 나를 잘 도와주는 노비 돌쇠도 보고 싶었다. 곧 집에 돌아갈 것이다라고 내 자신을 다독이며 선덕여왕님께 공손하게 인사하였다.
 
선덕여왕님이 가시고, 아버지와 나는 짐을 꾸렸다. 이제 탑 짓는 일도 끝났으니 집에 돌아갈 수 있다. 아버지께서는 그동안 백제 기술자들을 잘 대접해준 김용춘 감독님께 요즘 백제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휴대용 변기 호자를 드렸다. 백제의 호자는 중국에서 들여온 것을 역동적으로 변형시켜 고구려나 신라의 귀족들이 탐내는 것 중 하나다.
 
드디어 아버지와 나, 그리고 200명의 백제 기술자들은 백제로 출발하였다. 그런데 저만치 뒤에서 춘추가 뛰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춘추를 기다렸다. 춘추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개 전에 빚은 엄마 얼굴 수막새를 주었다. 그러면서 잘 가라고 나를 꼬옥 안아주었다. 춘추와 눈물 나는 이별을 하고 백제로 향했다. 이번 여행이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믿는다. 나도 이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아버지처럼 유명한 노반박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춘추를 꼭 다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