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전 연재] 구원의 미술관_강상중 미술 에세이④



여러분,
오늘은 설레는 소식을 안고 찾아왔습니다!!


뭐냐하면...... 바로......
​짜쟌~ (뿅!)






오늘 아침, <구원의 미술관> 연재가 네이버 모바일 책문화판에 소개된거 있죠^^
(네이버 관계자님~ PC 책문화판에는 빈 자리가 없을까요^^;;)
여러분이 보내주신 성원에 힘입어 앞으로도 열심히 올리겠습니다!!!
 
오늘은 강상중 선생님이 대재난과 폐허로 변한 도시를 담고 있는 두 그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마침 『구원의 미술관』을 집필하던 당시에, 3·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파도에 휩쓸려온 뻘과 쓰레기 더미에 잠긴, 생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도시를 바라보며 강상중 선생님의 사유는 다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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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잔해

갑작스럽게 덮쳐오는 커다란 쓰나미나 발밑이 꺼지는 듯한 대지진. 천재지변이 가져오는 죽음과 공포야말로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알려줍니다. 거기에 기아와 빈곤, 가족을 잃은 상실감, 끝이 보이지 않는 생활고가 겹치면 생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생존 본능마저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우리들은 영혼 없는 껍데기로만 남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전란과 살육, 불신과 시기가 퍼져나가, 자연도 사회도 이제는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혼란과 야만 가운데로 내던져진다면 과연 우리들은 어떻게 될까요? 혹은 원자력 발전소 사고처럼 완만하게, 하지만 착실히 전진해가는 방사능 오염이 계속된다면 우리들은 불치병에 걸린 듯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채로 소리 없는 절망을 견뎌내며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이제 3월 11일 이전, 언제라도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던 ‘어제의 세계’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런 느낌을 가지게 된 것은, 후쿠시마에서 온몸을 전율케 하는 ‘죽음의 잔해’를 직접 마주한 동시에 원전 사고로 인한 묵시록적 세계의 한 부분을 엿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후쿠시마의 한 피해 지역 바다 근처에 차를 세웠습니다. 차에서 내리자 강렬한 바다 냄새가 코를 찌르고 습기를 머금은 흙내음과 생생한 사취死臭가 제 감각기관을 타고 왈칵 밀려들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건축자재, 콘크리트 파편, 가구, 일용 잡화 같은 사람들의 일상이 숨 쉬고 있는 듯한 물건들의 잔해였습니다. 배를 드러내고 죽은 큰 물고기 떼처럼 뒤집어진 차들, 거기에 떠내려온 큰 소나무가 혈관 같은 뿌리를 드러낸 채 수면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습니다.

‘이건 언젠가 SF 영화에서 본 세계일 뿐, 현실일 리 없어.’ 저는 몇 번이고 그렇게 되뇌었지만 눈앞에 벌어진 참상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딜레마가 제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습니다.

이렇게 번민하는 동안 플래시백처럼 제 머릿속 한 켠을 스치는 그림이 있었습니다. 16세기 네덜란드(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에서 태어난 피터르 브뤼헐(1525-1569)의 <죽음의 승리>입니다.
 

 


메멘토 모리

브뤼헐은 <아이들의 놀이>나 <게으름뱅이 천국> <농가의 혼례> 등 농민들의 삶을 리얼하게 그린 사람으로 ‘농민 화가’라고도 불립니다. 그러나 브뤼헐은 밀레 같은 농민 화가는 아닙니다. 브뤼헐의 작품에는 독특한 유머와 함께 시대를 꿰뚫어 보는 시니컬한 비평 정신이 숨 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화풍에도 특유의 맛이 있습니다. 그림 전체가 돋보기로 들여다보며 그린 듯한 치밀한 세부 묘사로 뒤덮여 있는 것이지요. 화면 가득 작은 이야기들이 빼곡히 그려져 있기 때문에 브뤼헐의 그림에는 화가의 자아가 투영된 중심이라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죽음의 승리>는 독특한 세계관이 표현된 그림으로, 가로세로 각각 1.6미터, 1미터 크기에 화폭 가득히 ‘죽음의 군세軍勢’에 유린당하는 민중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창에 찔리고 채찍에 맞고 교수대에 매달린 무참한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 모습이 피해 지역의 상황과 너무나 닮았기에 몸이 떨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림 속에서는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기고, 단란하던 식탁이 어지럽혀지고, 조상의 무덤이 파헤쳐져 있습니다. 인간이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쌓아 올리고 지키려 해도 결국에 그것은 의미 없는 노력일 뿐이며, 허무함만이 남을 뿐이라고 냉정하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브뤼헐은 도대체 왜 어찌해볼 도리가 없어 보이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던 것일까요. 그건 당시 유럽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전 사고의 묵시록
‘죽음의 잔해’가 보여준 광경이 <죽음의 승리>와 겹쳐 보인다면, 원전 사고는 브뤼헐의 대표작 <바벨탑>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형 선박이 정박한 항구 바로 옆에 무언가를 넣어둔 그릇처럼 우뚝 솟은 탑. 심지어 그 꼭대기와 벽면이 무너지기 시작한 듯 보이는 거대한 건조물은, 지진 이후 수소 폭발과 방사능 유출을 일으키고 전 일본을 패닉으로 몰고 간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와 마치 쌍둥이 같습니다. 기묘하게도 같은 작가가 그린 두 장의 그림이 피해 지역의 광경과 너무나도 잘 맞아 들어가다니 정말 섬뜩할 지경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돋보기로 들여다본 듯한, 상상을 초월하는 치밀한 세부 묘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탑 속에 개미처럼 복작거리는 사람들이 말이 통하지 않아 서로 의사소통을 못한 채 파멸하게 된다는 결말은 오늘날의 상황에 빗대어 본다고 하더라도 가히 장대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한다 해도, ‘안전 신화’ 같은 새로운 신화로 덮어서 숨기려 해도 결국에는 천재지변이 오고 맙니다. 이쪽 상황은 생각도 않고 막무가내로 찾아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류가 전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재생 또한 좋든 싫든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아무리 폭력적으로 살아 있는 것들을 유린한다 해도 생명은 반드시 살아남아 싹을 틔우고 다시 번성합니다. 생명은 그렇게 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살아남은 사람의 삶은 계속됩니다.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원전 사고가 일어난 직후 저는 무력감에 휩싸였습니다. ‘이 상황에 미술 이야기 같은 거나 하고 있을 때인가’, ‘회화의 감동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의구심이 들어 이 책을 쓸 기력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거라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아름다움과 그림에 감동하는 것 또한 그것이 아무리 작은 힘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사람들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5회에서 계속)
 
  • 작가
  • 강상중
  • 출판
  • 사계절
  • 발매
  • 2016.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