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 해바라기_아름다운 고난이라는 신비

중국의 성실한 작가 차오원쉬엔의 작품을 소개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이다. 『빨간 기와』에 이어 최근 출간된 『청동 해바라기』를 늦가을 독자와 함께 읽어 나가게 된 것이다. 『빨간 기와』의 감동은 온통 피해 양상으로 부조된 중국의 문화대혁명(문혁, 1966~1976)이 어떤 세대 혹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해방 세상이었으며 그 안에 인간적 삶의 생생한 진실이 있었다는 것, 아이들을 통해 본 문혁의 한 진상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는 데 있었다. 그에 비하면 『청동 해바라기』는 제목처럼 심미적 감성으로 문혁과 문혁 이후 중국에서의 농촌살이의 어려움을 여러 겹의 신비한 빛살로 투사하여 엮어낸 기록이다.

 
   문혁 과정에서 농촌으로 하방(遐方)된 아버지와 그를 따라온 소녀, 그들이 사는 간부학교와 갈대밭 마을은 강물을 사이에 두고 보리밭 마을, 그리고 거기에 사는 청동과 떨어져 있다. 여기서 시골마을 사람들에게 문혁은 단지 간부학교로서만 상징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흔히 문혁 제재의 소설들이 가지는 피해 당사자의 고통, 상흔 등은 구구절절 속속들이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 보리밭 마을 사람들에게 문혁은 도시이자 도시 사람들이자 도시의 창법으로 부르는 도시인들의 노래였고, 바다 위에 떠 있는 어선의 불빛이었으며,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독립된 세계였다. 또한 어느 날 갈대숲에 간부학교를 세우고는 밤낮없이 밭일 논일을 하고, 밤새도록 회의를 하고, 강가의 모래알처럼 널린 물고기를 일부러 양식하고, 가끔 마을로 건너와 도시 사탕을 주고는 강 건너 보리밭 마을과 단절된 채 살다가 다시 어느 날 사라져 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떠난 뒤 텅 빈 간부학교, 바로 그것이었다. 보리밭 사람들에게 문혁은 잔상처럼 희미하게 존재했고 기억의 조각으로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유마지 마을과 그 주변의 작은 마을들에게 문혁과 문혁 이후는 과연 그렇듯 생경하고 무관한 것이었을까. 마을로 들어온 해바라기는 유실된 문혁의 유일한 증거이지만 그 또한 청동네 가족에 유입됨으로써 아비 잃은 가엾고 고운 아이의 정체로서, 그러나 그 이질적임으로 인해 어떤 별리(분리)를 예고한 채 보리밭 마을 속에 남겨져 있다. 문혁의 시간성이 해바라기를 통해 마을에 내재되었다면 추측만 무성한 간부학교 즉 문혁 이후는 사람들과 해바라기가 은행을 주우러 배를 타고 떠난 강남으로 표상되는데, 이처럼 이 소설 속에 문혁과 그 이후라는 시간성은 공간으로 전화되어 있다. 그래서 그것을 기억 속에 명멸하게 만든 것, 이것이 어쩌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공간 속으로 잔상화한 문혁이 이 작가의 궁극의 정처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소설에는 차오원쉬엔의 작품에서 언제나 그러하듯이 색감이 살아 있다. 보리밭, 반짝이는 강물, 해바라기, 빛나는 반딧불이가 들어찬 호박꽃, 모초로 인 금빛 지붕, 얼음 목걸이 등 ‘청동 해바라기’라는 제목에서부터 감지되는 빛의 향연은 청동이 말문을 트고 그토록 애타게 그리던 동생을 향해 달려가는 들판의 해바라기와 황금빛 해에 이르는 마지막 장면에까지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빛의 연출이 사실은 가장 척박한 중국의 농촌에서의 삶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점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곳곳에 아롱지는 아름다운 인간 관계의 응결은 사실은 슬픔이며 비애이고 적어도 중국 연구자인 내게는 분노였다. 중국 현대사, 사회주의 중국이 역사적 실패로 귀결되는 증좌(證左)로서의 문혁은 늘 삶의 곤경을 맞는 이곳 유마지와 그 주변의 사람들 앞에 어떤 의미도 없다. 누구나 문혁의 비극을 말하지만 이 소설에는 문혁보다 더 기막힌 참상이 있다. 메뚜기 떼가 휩쓸고 간 들판과 수마가 할퀴고 간 마을 등은 그 정점에 해당할 것이다. 
 
   작가는 보리밭 마을의 청동네로 대표되는 그 순정한 ‘살이’야말로 지고한 경지라 여기고 그처럼 신비한 빛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 엄혹한 세월을 살아낸 이들이여 고맙습니다, 그래도 생은 아름답습니다, 하고. 그러나 중국인인 작가는 문혁 전후의 중국 농민의 천형 같은 간난의 삶을 그렇게 위로하고 싶었는지 몰라도 나로서는 그럴 수 없는 심정인 것이 안타깝다. 중국혁명의 주체이고, 중국혁명의 성격을 규정짓는 농민과 농민혁명의 문제를 그 역사적 궤적 속에서 되짚어보면 이 소설 속의 그 모든 삶의 맺힘들이 몰역사적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이 소설로 보면 대다수 농민들을 위해 일으킨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 과정은 농민들의 삶과는 전혀 무관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의 농민들은 수천 년 동안 고난 속에 살아왔던 것처럼 그저 한 세월을 살아냈고 살아가고 있을 뿐인 것이다. 작가는 청동과 그 가족들의 뜨거운 가족애의 감동으로 고난 속에 사는 사람들의 빛나는 노고를 기리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년의 기억을 자아내는 순간 작가가 그려낸 순애보는 그 절대적인 사랑의 변주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이 문제에 대해 중국현대사에 대한 어떤 증언이라는 점에서 전격적으로 회답해야 할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문학은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현실세계와의 연관을 끊어낸 채 동떨어진 시공간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중국에서 농민적 삶과 문혁의 문제에 대해 결코 무지하지 않은 작가가 이러한 작품을 써낸 데에는 나름의 서사 전략이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중국 사회주의에 대해 관료주의의 문제로서만 간혹 언급할 뿐 실체로서 그것의 상을 잡아가지 않는다. 작가는 그 특유의 몰역사성과 몰정치성으로 중국 사회주의를 추문(推問)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집요하게 중국적 삶의 진정성을 부각시켜 내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영롱하게 핀 인정과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우직함과 끈기 등이 그것이다. 소설 속에 형형색색 빛나는 청동과 해바라기의 지순한 우애와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전편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예의는 문혁의 고난조차 상품화된 시장사회주의의 오늘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중국민을 위한 애수의 소야곡일 수 있다. 아니면 오늘의 중국과 중국 사람들이 정녕 잃어버린 삶의 지향과 가치에 작은 방향타를 제시하고 싶은 소박한 바램이든지. 그러나 이제는 중국작가들이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쳤으면 좋겠다. 과거로의 에돌이는 오늘의 삶의 참상을 비껴가기 위한 변명이 된 지 이미 오래인 것이다. 
 
 
 
 
 
글 -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
 
*이 서평은 2007년에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