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 : 이중렬

제2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청소년부 우수상

이중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개념일수록 실제로 그것에 대해 아는 것은 매우 적은 경우가 많다. 그 개념이 사회적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면 이와 같은 현상은 더욱 광범위하고 명확하게 발생하곤 한다. 

‘소크라테스’는 한 시대를 살았던 특정 인물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철학자’를 대표하는 일종의 추상명사처럼 사용되고 받아들여진다. 추상화된 개념은 자세히 알 수 없고 알 필요가 없고, 그래서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에게 ‘소크라테스’는 그런 존재이며 마찬가지로 ‘변명’이라는 텍스트는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쓰여진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문 정도로 요약되어 있다.
 
그러던 차에 『소크라테스의 변명 - 진리를 위해 죽다』를 읽은 것은 그 죽어 있는 추상명사로서의 소크라테스와 변명이라는 텍스트에 생기를 불어넣는 작업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의 재판이 어떤 사회적 정치적 맥락에 놓인 것이었는지,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상세한 배경 설명이었다. 이는 딱딱한 철골 구조물 같이 놓여 있는 ‘변명’이라는 텍스트를 완성된 건물로 만들어 줄 시멘트와 벽돌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제 비로소 변명은 먼지 냄새 나는 고전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둔 한 노인의 정열적이며 고뇌에 찬 자기 변론으로 다시 태어났다. 더 이상 소크라테스는 추상명사가 아니라 한 실존적 인물의 이름으로 변신한 것이다. ‘변명’의 독해는 그제야 시작된다. 

모든 공정한 재판은 가려진 진실을 밝혀내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나 공정하지 못한 재판은 기록으로 남아 역사가 된다. 그리하여 오랜 시간 동안 반성적으로 읽히고 인구에 회자됨으로써 사후적으로 진실이 재구성되며,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성찰적인 화두로 남게 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후자의 전형적인 예다. 이 재판이 공정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도 명백하다.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알다시피 무수히 많은 인격신으로 구성된 풍부한 신화와 전설의 역사를 가졌으며 공식적으로 다신교 국가였던 그리스에서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은 재판에 회부될 만한 죄가 될 수 없다.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 역시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타락’이라 함은 정도를 잃고 올바르지 못한, 혹은 부정적 가치 평가가 가능한 상태로 전이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에게 몰려든 젊은이들은 모두 스스로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며 사회와 주변을 보는 안목이 성장했다. 이와 같은 변화를 타락이라 할 수 있겠는가? 소크라테스 스스로는 더 나아가 자신은 누구를 가르친 적도 없으며 악영향을 미친 적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은 실체가 없는 수사일 뿐이며 일말의 진실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허구적인 죄목에 대한 대가로 사형을 요구하였다는 것은 이 재판이 얼마나 부당하며 불공정한 재판인지를 더욱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모든 불공정한 재판에서 피고가 재판을 받는 진짜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허구적 죄목 뒤에 숨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 진실한 죄목은 그 재판을 주관하는 재판관, 혹은 그들을 조종하고 있는 권력자들의 위선과 거짓에 잇닿아 있기 마련이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에 회부된 이유도 따로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사회의 다른 선생들과 논변가들처럼 웅변술이나 논리 싸움에서 이기는 기술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사람들과 대화하고 질문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을 통해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스스로 각성하고 반성하도록 만들었으며 본질적 앎과 실천에 이르도록 인도하고 있었다. 평범하고 안이하고 자신만만하게 일상을 영위하던 젊은이들이 소크라테스의 질문을 통해 고민하기 시작하고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으며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반성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믿고 있던 확고한 믿음과 가치 기준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각개격파식의 게릴라 전술은 그리스 사회 전체에 퍼져가고 있었다. 

반성과 자각은 개인적 차원에서 머무르는 법이 없다. 자각된 개인은 곧바로 사회와 현실로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그들은 곧바로 그리스 사회의 타락과 정치적 문제점들을 질타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그리스 시민들이 만족하며 편안히 살아가는 그 일상이 그들이 보기에는 심각한 위기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정치적 운동으로 가시화되었으며 결국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정치적 반역자들의 배후 인물로 지적되기에 이른 것이다. 

다구나 소크라테스의 격파 대상은 젊은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잘 알려진 정치가와 학자, 예술가 등 많은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자들은 모두 소크라테스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자신이 소유한 지식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이 큰 자들일수록 소크라테스와의 대화에서 밝혀지는 것은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의 무지조차도 깨닫지 못할 만큼 몽매하며 허위의식에 젖어 있다는 것이 까발려질 뿐이었다. 마치 소크라테스는 유명 인사들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것처럼 열심히 그들에게 질문하고 반박하고 논리와 근거를 들어 싸움을 걸어대었다. 이와 같은 그의 행동이 당시의 지배층들에게는 얼마나 불편한 존재였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소크라테스는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조용한 일상을 술렁이게 만들고 요동치게 하는 하나의 불온한 사상이자 위험 한 현상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게 된 진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권력자들에게 있어 그는 제거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고인 물에 이끼가 끼고 물이 썩어 들어가듯 안이한 일상과 획일화된 평온함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권력은 독재로 변해가고 사회는 병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사회를 자각시키고 일깨우는 것은 언제나 주류와 다른 목소리들이다. 이 소수의 다른 목소리들은 그 사회가 가고 있는 길에 자꾸만 딴지를 걸고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안락한 일상과 아무 문제가 없는 것만 같은 현실에 대하여 자꾸만 문제를 제기하고 불평을 해댄다. 권력을 잡은 자들과 지배층, 그리고 다수의 대중은 그와 같은 소수의 다른 목소리가 언제나 불편하기 마련이다. 전체 사회에서 그 소수의 불협화음만 사라져 준다면 완벽할 것이라는 착각과 자신들의 허위와 거짓이 까발려지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그 소수의 목소리를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언제나 그 소수의 다른 목소리를 제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갖가지 기재들을 동원하여 실현하고야 만다. 소크라테스를 재판하고 사형시켰던 당시 그리스의 지배층과 권력자들 역시 그러하였다.

역사는 진보한다는 신념은 잘못된 것일지 모른다. 2400여 년 전의 그리스 사회에서 진행되었던 그 불공정하고 폭력적인 재판이 240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 특정한 책을 소지하고 읽었다는 것이 적국에 대한 ‘찬양?고무’가 되고 그래서 그들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국가가 인정한 신을 믿지 않았다’는 것만큼이나 황당한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자들이 한국 사회에도 존재하고 있다. 상식적이며 공정한 판단을 해야 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그와 같은 엉터리 죄목을 나열하고 있는 법을 헌법에 위반되지 않는 법이라고 고집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폐지해서는 안 된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그들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는 것이 재판관의 덕’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남북한의 평화적인 통일과 협력을 주장하는 것, 그리고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적국에 대한 찬양과 고무로 둔갑한다. 그리고 인권에 반하는 악법을 폐지하자는 주장이 국가의 안보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적 행위로 매도당하는 것이다. 소수의 다른 목소리는 다수의 보수(현실을 지키고 유지하자는 문자적 의미에서의 보수)적인 사고와 목소리에 침식당하여 존재할 여력이 없다.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목소리들은 즉각 제거되어야 하며 배제되고 탄압받는다. 하나도 달라지지 않고 반복되는 이 지독한 역사의 아이러니.

소크라테스는 결국 그다지 큰 표 차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유죄의 판결을 받고, 다양한 탈출의 기회가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독배를 마셨다. 어쩌면 스크라테스는 스스로 이와 같은 죽음을 연출하였는지 모른다. 법정에서 현란한 변론을 통하여 그리스 시민들과 정치 상황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그와 같은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스스로 그리스 역사에 던져진 질문으로 남기를 원했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는 살아서는 그리스라는 느리고 살진 말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등에’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죽어서는 역사에 던져진 질문으로서 그를 죽인 그리스 시민들은 옳았는지, 그리고 그 재판은 공정한 재판이었는지, 그리고 진지란 무엇이며 참으로 선한 것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의 한국을 사는 우리는 우리를 괴롭히는 또 다른 ‘등에’들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도 거짓과 위선이 지배하는 불공정한 재판정에서 외로운 변론을 진행하고 있을 우리시대의 등에들, 그리고 그들을 심판하고 있는 오늘의 우리 모두에게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다른 목소리가 괴로운가? 그들은 한국이라는 살진 말을 깨어 있게 만드는 우리 시대의 ‘등에’들이라고 말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재판관의 덕이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는 것이고, 연설자의 덕은 진리를 말하는 것”임을. 그것은 한국 사회가 정의와 부정의를 가리는 현명함이 아니라, 고요한 일상을 지키고자 하는 욕심과 지배층의 허위의식에 의해 우리 시대의 ‘등에’들을 배제하고 제거하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 때문에 더욱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