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 니가 어때서 그카노_ 불쑥 말 걸어 올 것 같은 아이들

불쑥 말 걸어 올 것 같은 아이들

최나미(동화작가)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 시골이란, 그냥 꿈같은 외지일 뿐이다. 다행히 지방에서 직장을 다니신 아버지 덕분에 방학을 날 수 있던 곳, 그게 내 외지 경험의 전부다. 땡 하고 방학이 시작되면 피난민처럼 서둘러 짐을 싸서 서울을 떠나 개학 바로 전날까지 꼼짝없이 잡혀 있어야 하는 일정, 불과 한 달 남짓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던가.

겁이 많은 나는 그 곳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늘을 잘라 가둔 듯 사방으로 둘러친 산들이 싫었고, 밤마다 뒷산 나무들을 훑고 지나는 바람 소리도 무서웠고, 작은 방 높은 창문의 나무 그림자가 두려웠으며, 누구네 집에 놀러 왔던 언니가 아파트 앞 어설픈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다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그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그 곳에 사는 아이들은 방학 때만 오는 아이들을 신뢰하지 않았고, 때로는 그 텃세 때문에 상주파와 방학파로 패가 나뉘었던, 그 녹록지 않은 대결도 긴장감으로 내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도 한 이틀? 그 시간이 지나면 경계는 허물어지고 아이들은 너나할것없이 어울려 산으로 냇가로 떼지어 몰려다니기 일쑤였다. 방학이 끝나갈 즈음에야 엄마들의 성화에 못 이겨, 노느라 못다한 방학숙제를 한다고 어느 집에 모여 진땀 빼던 의식은 해마다 정해진 수순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헤어질 때가 되고 상주파와 방학파들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이별을 맞는다.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기억만 안고 돌아가는 아이들에게나 허전하게 남을 아이들에게나 결코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상처였다. 다음 방학을 맞아 그 곳에 가게 되면, 그새 부쩍 큰 아이들은 그 서먹함을 텃세와 도전으로 맞받아치며 또다시 우리만의 축제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그랬다. 너와 나를 구분하는 데 서툴렀고, 대결이라는 미명도 낯가림을 극복하는 과정이었지 어른들처럼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구분짓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 이틀이 지나면 온전히 우리가 될 수 있는, 진짜 우리들만의 세상이 존재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잊고 살았던 감정들로 가슴이 뭉클거렸다. 어른들의 복잡한 사연들로 훼손할 수 없는 아이들 세상의 질서는 송연이나 기철이, 경순이와 정식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선명하게 되살아나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 작은집에 와서 살게 된 것도, 언제나 맡아 놓고 나머지 공부를 하는 것도, 교도소에 들어간 아버지를 두었다는 사실도 기실 어른들이 개입하지 않으면 아이들 사이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의식이 단단하지 않아 관계에 유연하고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건강함도, 이미 그 미덕을 잃은 지 오래인 내게는 오직 부러워하는 몫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아이들 세상만을 보여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아이들만 사는 게 아닌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어른들과의 관계는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 첫째와 둘째를 차별하는 할머니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성공 일로를 걷던 큰아버지의 사업 실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이혼, 경제적 손실로 낙담하다가도 일당 2만 원에 자리 털고 일어나는 엄마,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다 기어이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 정식이 아빠, 아이들 교육 문제 때문에 서울로 이사 가는 경순이네까지, 어른들을 함께 아울러야 하는 현실의 이 아이들은 자기 목소리를 분명하게 갖고 있다. 어쩌면 아직은 어떤 현실을 눈에 띄게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해도 이 아이들의 미래가 건강할 거라는 믿음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 부모들보다 더한 어려움이 그 아이들을 옭죄어, 살아갈 기력을 잃고 낙담하는 날이 오지 않는다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지금의 유연함과 건강함을 잃지 않는다면, 이 아이들의 미래에는 초록빛이 바래지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을 거듭했던 방학의 어느 날엔가 꼭 만났을 것만 같던 송연이나 기철이가 불쑥 말 걸어 오면 나는 뭐라고 대꾸해야 하나?
"니 자꾸 시비 걸 끼가?"
 
 
 
최나미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아동학을 공부했습니다. 잡다하게 책을 읽고 사람들 관찰하는 것을 좋아하며,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내는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걱정쟁이 열세 살』,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 『진휘 바이러스』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