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흘러가는 이야기랄까…… : 이은실

제1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고등부 우수상 수상작
 

 
어렸을 때의 일이다. 불을 켜 놓고 밤새도록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책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 나라 전래동화 종류였던 것 같은데, 그 때의 느낌만은 생생하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느낌.

그 때보다는 더 나이를 먹고 『임꺽정』을 읽게 되니, 그 느낌이 더욱 아련하다. 방학이라는 시간을 이용해서 그 소설을 읽기로 마음먹고 한 달 가량 매달렸다. 책을 읽을 때만큼은 방문을 걸어잠그고 커튼을 쳤다. 그러면서 스탠드를 켜 놓고 책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느끼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느낌.

처음에는 이야기가 좀 친숙하게 다가오지 않아서 힘들었다. 임꺽정 이야기가 바로 나오지 않은 것도 사람을 애타게 만들었지만, 아마도 가장 애먹었던 부분은 어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모르는 어휘들이 많아서 힘들었다. 그러나 몇 권을 읽고 나니 그 중에서 정답게 다정하게 느껴지는 말들이 많았다. 너미룩내미룩, 대궁, 어리무던하다, 진동한동, 포실하다……. 양반들 이야기의 어려운 한자들보다 서민들 이야기의 그런 말들이 훨씬 감칠맛이 있다. 그 말들도 홍명희 선생님의 노력이라고 생각하니 더욱 정답게 생각되었다.

『임꺽정』을 읽기 전에는 단순한 활극소설 종류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임꺽정』은 활극소설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 주는 소설이었다. 때로는 바람난 마누라를 징벌하기도 하고, 때로는 벗들끼리 만나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때로는 부부 금슬을 염려도 해 보고, 때로는 죄를 져서 귀양살이를 가기도 하는…….

감긴 천을 풀어 내듯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사실적이다. 이야기들은 특별히 극적이지도 않고 하강하지도 않는다. 그저 물 흐르는 듯이, 아니면 순리대로, 진행해 나가는 듯이 느껴진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가족들을 구출할 때 일이다. 꺽정이의 가족들이 양주에서 갇혔을 때는, 꺽정이의 아버지와 팔삭동이가 죽는다. 그리고 꺽정이의 서울 처들이 갇혔을 때는, 원씨가 자결하고 박씨와 김씨는 관비가 되어서, 전옥 깨칠 모의를 중단하게 된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억지를 쓰는 것 같지 않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 자연스러운 맛은 『임꺽정』을 읽는 가장 큰 묘미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나오는 인물들도 뚜렷한 개성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것이 흥미롭다. 임꺽정, 박유복, 이봉학, 곽오주, 황천왕동, 배돌석, 오가, 서림……. 성질이 급한 사람도 있고, 찬찬한 사람도 있다. 명궁도 있고 돌팔매의 명수도 있다. 세상이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어 흥미롭다면, 소설에서의 다양한 인물들도 재미를 더하는 것이 아닐까. 천편일률적인, 정의롭다거나 용맹하기만 한 인물들만 나온다면 무슨 맛이겠는가.

특히 관심이 가는 인물은 곽오주이다. 아내를 잃고 아들을 기르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죽이고 만, 그래서 아기 울음소리만 들리면 자신을 주체하지 못하게 되고 만 곽오주. 아무리 어린아이들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가 흉악하다기보다는 애처롭단 생각이 든다.

애꾸눈 노밤은 우스꽝스럽다. 의리를 중히 여기는 인물도 아니고, 기회주의적인 인물로서 사사건건 수다를 늘어놓는 인물이건만, 그에게는 웃음이 있다. 마치 뺑덕어미가 하는 짓이 우리를 웃게 만드는 것처럼. 짐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 호부를 하던 것은 아직도 뚜렷이 뇌리에 남아 있다.
『임꺽정』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은 도둑들이다. 살인도 하고, 방화도 하고, 도둑질도 한다. 그런 일들을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소설은 도둑 교과서는 아니지 않은가. 어떤 인물이든지간에, 그 사람들의 행동을 생생히 보여 준다면 그것으로 족한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나는 그들이 자포자기하는 인물들이 아니어서 좋다. 살아가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살기 위해서 그들은 갖가지 수단을 동원한다. 힘없이 팔다리를 늘어뜨리지 않은 그 생명력은 얼마나 강렬한가. 문득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스칼렛 역시 삶을 개척해 나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으로 갈수록 나는 이야기가 끝나가는 것이 아쉬웠다. 임꺽정과 청석골패의 비참한 최후로 점점 다가가는 느낌이어서. 그러나 10권을 읽고 나서는 더욱 아쉬운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임꺽정』은 미완성이었던 것이다. 그게 그렇게 서운하고, 허전할 수가 없었다.

늙은 오가는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느낀다. 아내가 살아 있었으면 이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죽은 아내보다 살아 있는 자신이 더 애처롭다고 느낀다. 이 소설에서 보기 드물게 맥빠지는(?) 부분 중 하나지만, 미완의 대작 소설이 이렇게 흐릿하게 끝난다고 생각하니 더욱 약이 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좋다. 홍명희 선생님이 '순 조선'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 것처럼, 『임꺽정』은 너무나 한국적이다.

오랜만에 옛날 전래동화를 다시 읽는 느낌이다. 무당들의 열두 거리 굿거리나 단옷날 그네 뛰던 사람들의 모습은 아름답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오랜만에 나를 철철 휘감고 놓아 주지 않는 소설을 만난 것 같다. 『임꺽정』은 진득진득하게 달라붙는 묘미가 있다. 생생한 인물들과 만들어 내지 않은 듯한(?) 이야기들과 한국적인 갖가지 맛들.

눈을 지그시 감아 본다. 그리고 그 온갖 사람들을 다시 한번 만나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