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 차효찬

제3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우수상
차효찬

 
 
과거와 그 집적물인 역사의 편린을 되새긴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한번 쯤 고민할 때가 있다. 세계나 인류, 국가와 같은 거창한 역사는 아닐지라도 개개인의 기억 속에 차근차근 보관돼 있을 그 한 겹 한 겹의 켜들을 올올이 들춰갈 때 너나 할 것 없이 아쉬움과 한탄, 웃음과 그리움을 자아내는 것이 우리, 인간이 아닐까…….

세월의 연륜과 신산스러움을 얼굴에 고스란히 간직하신 어르신네께선 “내가 지나온 내력을 책으로 쓰자면 공책 열권도 모자란다”라고 말씀하시곤 한다. 젊은이라면 한 번쯤 흔히 듣고 쉽게 흘려버렸을 이 유언(流言)을 나는 며칠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통해서 실감하게 됐다. 살아생전 자식 걱정이 하루의 일과가 돼 버린 지 오래인 할머니의 임종을 낯선 병원에서 맞게 된 어머니는 고인을 떠나보내며, 당신은 아직 보낼 준비가 안돼 있는데 일방적으로 떠나시면 어떡하냐며 살아있음에서 오는 기본적인 생기를 잃으셨다. 이제 모녀간에 마주앉아 토닥토닥 시끄럽게 되새길 공통의 기억은 사라진 것이다. 그토록 생생한 살아남은 자의 기억 앞에 어머니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기억의 한 축이 믿기지 않는다고 하신다. 
망자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에 뜻밖의 노트 예닐곱 권이 발견되었다. 살아계실 땐 노인이 심심하셔서 소일거리로 삼거나 손을 쓰면 치매예방에도 좋겠거니 하고 약게 가벼이 넘겼던 그 노트엔 당신의 소망과 자식에 대한 걱정이 가득 차 있다. 확고한 종교인으로서의 신에 대한 축복과 경배, 자식의 행복과 건강을 간절히 기원한 기도를 빽빽이 적어 내려간 그 끝나지 않을 것처럼 반복되는 삐뚤빼뚤한 글씨의 행렬들……. 이 정도의 염원과 기도로 메워진 노력이라면 이 역시 개인의 ‘역사’로 등록되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노트 안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고인과 얽히고설켜 기뻤던 일, 서운했던 일이 잔잔히, 때론 격렬하게 흐르지만 기본적으로 흐르는 배경의 감정은 역시 아쉬움인 것 같다. 돌아가신 분의 기록이나 사용할 주인일 잃어 쓸쓸히 남겨진 온기 잃은 유품 같은 것을 보면 기뻤던 일을 생각해도 왜 항상 슬퍼지는지 모르겠다. 혹시 자극하면 저항할 수 있는 살아있는 것과는 다르게 이제 영원히 방어할 수 없는, 그리고 다시는 쓰여질 수 없는 ‘사라짐’과 ‘소멸감’ 때문은 아닐까? 할머니께서 쓰시던 누렇게 색 바랜 노트와 글씨가 다 지워져 상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펜, 맨질맨질 닳은 수저와 젓가락은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즉 방어할 수 없는 수동의 상태로 영원히 머물게 됐다. 방어할 수 없고 자기주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이토록 슬픈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난 할머니의 임종을 통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망자의 아쉬움과 회한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후손들의 기억 속에 간직될 수밖에 없고, 조상님네를 교훈삼아 바르게 살아가려는 노력으로 경주될 수 있을 뿐이다.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서문에서 저자가 답한 ‘역사의식을 가진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말도 기본적으로 위의 개인의 역사에서 내가 깨달은 아쉬움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조화로운 삶과 세계를 만들려는 목적이 있음을 암시한다. 의식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개인들이 쌓아올린 공동체의 기억을 마음속에 각인시킨 자이다. 그 수많은 개인들의 집적된 기억을 통해 우리는 인류의 실수와 죄악을 반복치 않으려 그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소멸된 선행자들을 다시 불러 일으켜 되새기려는 수고를 기꺼이 치르려 하는 것일 지도 모른다. 

인류의 시대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나누고 전체시대를 12시간으로 가정했을 때 우리의 기억이 미치는 역사시대는 1시간은커녕 1분도 안되는 고작 43.2초가 된단다. 이 짧은 시간을 통해, 다른 역사책과는 구별되는 이 책의 미덕인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저자가 캐낸 인류역사의 키워드는 정복과 마녀사냥, 노예, 나치와 서구 자본주의세계 중심의 디즈니에서 보는 것과 같이 욕망, 제국주의와 같은 우울하고 슬픈 것들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기만 했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동화주인공조차도 서양 중심의 제국주의적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저자의 눈길엔 놀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미 10만 명 이상의 이라크인을 학살한 미국이라는 아름다운 나라(美國)의 황당한 침공과 그 나라의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에일리언’이라는 괴기영화를 예전에 보면서, 진짜 악당은 끔찍하게 생긴 가상의 우주괴물이 아니라 테러에 맞선다는 명분을 빌미로 일방적 공격을 감행하는 우리 인간이 아닐까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엄연한 하나의 주권국가에서 벌어지는 살과 피가 튀는 끔찍함을 단신뉴스로 가볍게 들어 넘기고 이런 허구의 괴기영화나 끔찍하게 여기는 바로 우리가 오히려 괴물화 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나의 이런 짧은 생각이 ‘에일리언’을 음침한 자본주의사회의 괴물화 된 착취성으로 분석하는 저자의 통찰로 발전되고 있어 반가웠다. 

아메리카대륙의 철도를 놓는데 가장 고생을 한 것은 ‘쿨리’라고 불렸던 중국인이라는 설명에서는(사전을 찾아보니 ‘苦力’으로 되어 있다. 얼마나 고생했겠는가는 명칭에서부터 드러난다), 일본 땅에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철도의 목침 하나하나엔 일제강점기 제국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피땀이 배어있다는 기막힌 현실이 겹쳐져 가슴 아팠다. 프랑스 혁명 당시 귀족을 조롱하는 ‘피가로의 결혼’에 곡을 붙인 모차르트나 감자의 못생긴 겉모습에 역병에 걸릴 줄 알고 초창기 사람들이 먹지 않았다는 가벼운 에피소드조차도 면면히 흐르고 있는 인류의 욕망과 공격성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시선의 무게에 마음 편히 읽을 수 없었음을 숨길 수 없다. 

인류의 야만성에 질겁하면서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 그래도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살아야 한다는 확신을 주는 한 줄기 빛을 찾을 수는 없을지 곰곰이 곱씹어 본다. 그리고 여성억압의 기제였던 마녀사냥이나 근대적 군사문화의 규율체제를 뚫고 인간의 자유와 해방이라는 고귀함이 ‘파리의 노트르담’에 나오는 괴물 ‘콰지모도’로 형상됐음을 증언하는 저자의 시선을 발견한다. 중세의 압제에 눈을 뜨는 근대적 민중 말이다. 서로서로에게 벚꽃 흩날리는 봄같이 살가운 세상은 어쩌면 요원한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점철되는 욕망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비참함이 영원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억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참담함이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욕망과 공격성을 뒤로 하고 말 그대로 “좋은 세상”을 문화를 통해 꿈꿔본 무덥고 슬픈 날의 책읽기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