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가르치는 자연의 침묵 : 박미선

제3회 청소년 독서감상문 대회 일반부 우수상
박미선

 
 
‘가능하면 침묵을 지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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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연이 인간에 관계하는 의미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은 말이 없는 가운데서도 자신의 자리에서 모든 생명체에 기능하고 있다. 묵묵하고도 진실하게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황혼의 하늘과 나이든 나무에 경외심을 품은 사람은 삶의 철리(哲理)를 어느 정도 깨우쳤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로버트 펙이라는 12살 난 평범한 소년은 미국 버몬트 주, 드넓은 자연의 품속에서 자라고 있다. 아버지는 돼지를 잡는 도살꾼으로서 사회적 지위는 보잘것없지만, 아들에게 침묵의 중요성을 가르칠 줄 알 만큼 현명한 사람이다. 자신의 온 생애를 다져온 충실한 노동과 신성한 자연 속에서 얻은 지혜는 그를 현자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이웃에게 예의를 다하고, 성실한 이를 존경할 줄 알며, 셰이커 교도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켜갈 줄 아는 그는, 비록 글을 모를 지라도 아들에게는 누구보다 큰 스승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자전적 소설은 ‘아버지에게 바친다’라는 저자의 헌사가 조금도 무색치 않다. 

뭇 생명들을 품고 있는 버몬트 주의 광활한 초지에서 소박한 삶을 가꾸어 가는 농부들의 삶은, 어린 시절 내 고향 충북 보은 사람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닭과 돼지를 키워 살림을 늘리고, 무엇보다 집안의 소를 내 목숨같이 여기는 마음은 동서양이 똑같았다. 그저 가축을 돌보는 차원이 아닌, 비록 동물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한 생애와 고락을 함께 하는 순정의 마음, 그것은 자연을 경외하고 그에 순응하는 삶이었다. 

돼지나 소와 한 자리에서 거리낌 없이 잠드는 것은 생명을 아끼고 보듬는 마음, 즉 산 것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로이다. 이러한 연민의 정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근원적인 정서이다. 이효석의 단편 ‘돈(豚)’을 보면 시골 청년 식이가 병든 돼지를 방 안에 들여 놓고 같이 숙식을 하며 생사를 함께 나누듯 지극한 정성을 보이는 장면이 있다. 버몬트 주에 살고 있는 소년 로버트 펙도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기 돼지 ‘핑키’와 곧잘 한 잠자리에서 잠을 잔다. 로버트뿐만 아니라 그의 이웃들도 가축을 특별히 돌보아야 할 때 아무 거리낌 없이 그들과 한 우리에서 잠들곤 한다. 우리 나라의 시골 청년 식이나 미국의 로버트 펙은 동서양이라는 거리를 넘어, 인종을 넘어, 생명에 대한 경외심으로 인해, 결국 하나의 유기체로서 이어져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근래 배아세포 연구에서 인류사에 획기적 업적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는 황우석 교수에게는 실험 대상이 되는 동물들, 특히 소를 돌보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고 한다. 황 교수에 따르면 생명공학의 기초는 생명에 대한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험대상이 되는 소나 돼지들은 대단히 정성스런 손길을 받게 되는데, 그 동물농장에는 황 교수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한 사람의 일꾼이 있다. 이분은 조선족 출신으로서 소의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소와 한 자리에서 잠들며 소를 돌본다고 한다. 소가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고 자산의 전부이던 과거 농경사회나, 첨단 생명 과학의 현대 문명 속에서도 인간은 이렇듯 생명의 존재감에 대해 특별한 경외심을 잃지 않고 있다. 

로버트는 친구의 놀림 때문에 학교를 빠지기도 하는 보통의 소년이지만, 이웃 소의 출산을 돕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연히 이웃 태너 아저씨 소유인 ‘행주치마’의 출산을 목격하게 된 로버트는 송아지가 빠져나오도록 돕기 위해 자신의 바지를 찢고, 온 몸이 가시덤불에 긁히는 고통을 당하고도 뒤이어 서슴없이 소의 입에 팔을 집어넣는다. 팔이 물어뜯기는 고통 속에서도 소년은 암소의 목에 걸린 혹을 빼낸다. 그것이 누구의 소인가 하는 문제는 처음부터 소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기 소유가 아닌, 자신에게 하등의 이익을 줄 것도 아닌 그저 이웃집 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고통 받는 한 생명체 자체를 돕기 위해 소년은 자신의 목숨을 던지다시피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로버트는 오랫동안 앓아 눕게 되지만, 뜻하지 않게 태너 아저씨로부터 예쁜 새끼 돼지를 얻게 된다. 

이 돼지에게 로버트는 핑키라는 이름을 붙이고 초원을 함께 뛰놀며 애지중지 키운다. 그러던 중 태너 아저씨의 호의로 아저씨 부부와 함께, 로버트의 도움으로 태어난 보브와 비브 쌍둥이 송아지, 그리고 핑키를 데리고 꿈에 그리던 러트랜드 전시회에 참가한다. 그리고 거기서 ‘예절바른 돼지에게 주는 일등상’ 파란 리본을 핑키의 목에 걸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꿈같은 시간도 잠시, 아빠는 병이 깊어가고 핑키는 수퇘지를 붙여 줬건만 도무지 새끼를 낳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날이 집안의 살림이 궁핍해져 가자 아빠는 핑키를 잡게 된다. 

이 소설의 미덕은 어떤 막연한 이상향이나 감상적인 동정심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식구들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친구 같은 돼지 핑키를 잡게 되는데, 순간적으로 아빠를 원망도 해보지만 결국 로버트는 그 아픔을 인생의 이치로 받아 들일만큼 성숙해진다. 그리하여 핑키의 피가 묻은 거친 아빠의 손이 로버트의 뺨을 쓰다듬을 때, 로버트는 그 투박하고도 경건한 손에 입맞춤을 한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빠는 눈물을 보인다. 

아빠는 글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진실되고 자유로운 삶을 통해 로버트에게 인간의 삶을 가르쳤다. 생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식구 같던 돼지도 잡아야 하고, 이웃 간의 평화를 위해서는 튼튼한 울타리 또한 필요한 것임을 아빠는 자연의 이치를 빌어 보여 주었다. 봄에 우는 울새 소리, 여우가 여기저기 흘리는 오줌도 결국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나타내 보이는 것, 즉 울타리를 치는 표시라는 것이다. 

독수리가 산토끼를 사냥하는 모습을 보고 로버트는 독수리가 자기 새끼들에게 어떻게 산토끼 고기를 던져 주는 지 궁금해 하며,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를 위해 다람쥐 위 속에 들어 있는 호두를 꺼내기도 한다. 이러한 독수리나 인간이 잔인하다는 표정을 짓지 않는 이 소설은 쓸데없는 포즈가 없어서 좋다. 

그럼으로 이 책은 광대한 자연과 그 일부인 인간이 어떻게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지, 한 시골 마을의 자연과 그 속에 담긴 순박한 사람들의 삶을 통해 거대한 생태계의 순환을 자연스레 보여 준다. 따라서 어설픈 감상이나 값싼 동정심에 치우지지 않는 담백함이 편안하고 친근하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이 또한 인간 세계의 순리를 지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또는 죽음에 가까워질 때 자꾸 자연의 품을 갈망하게 되는 것은, 면면히 이어져 우리의 세포에 새겨진 아득한 옛 조상으로부터의 전언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순리를 깨우치라’.

돼지가 한 마리도 죽지 않은, 아빠가 돌아가신 날 아침, 로버트는 장비실에서 아빠가 쓰던 농기구들을 손으로 쓸어 본다. 아빠의 손때로 반들반들해진 손잡이의 은은한 빛, 그것은 황금의 칠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그로써 로버트는 물질적 가치로서 함량할 수 없는, 막대하고 소중한 유산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성실한 노동의 의미로 빛나는, 아빠의 체온이 배어 있는 그 연장들로 로버트는 그의 삶 역시 충실히 일구어 나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