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십 다운』 서평 -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보금자리를 향한 치열한 여정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보금자리를 향한 치열한 여정

김지은|아동청소년문학 평론가

해 질 무렵 몽마르뜨 공원에 가면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다니는 토끼들을 만날 수 있다. 몽마르뜨 공원은 서울의 대검찰청 청사 뒤편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이다. 서울시는 2000년 반포 배수지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원래 있던 아까시나무 숲을 허물고 공원을 만들었다. 이 부근에 모여 사는 프랑스인들에 대한 친선의 마음을 담아 ‘몽마르뜨 공원’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토끼 언덕이라고도 불린다. 누군가가 이곳에 토끼 한 쌍을 유기한 것이 시작이었다. 두 마리의 토끼는 천적도 없는 곳에서 무서운 번식력으로 영역을 확장했고 소문이 퍼지자 토끼를 키우다 버리려던 사람들이 몰래 찾아와 토끼를 두고 갔다. 어느덧 몽마르뜨 공원의 토끼는 천 마리를 넘었으며 폐사가 이어지자 구청과 주민들은 먹이를 마련하고 대책을 세우느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반려동물 판매 코너에서 2만원 남짓으로 구입할 수 있었던 토끼를 풀숲에 버리면서 죄책감을 느끼는 주인은 많지 않았다. 자연으로 돌려보낸다고 주장하며 단속반에게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빌딩과 10차선 도로로 둘러싸여 고립된 도심의 공원은 토끼의 마을이 아니라 무덤이 되었고 버려진 토끼들은 그 안에서 죽어 간다.

토끼들의 대모험을 담은 『워터십 다운(watership Down)』은 1972년에 발표된 판타지다. 그해에 가디언상과 카네기상을 수상했다. 한국어판은 2003년에 1판이 출간되어 10쇄를 찍었고 16년 만에 2판 1쇄가 나왔다. 잉글랜드 남부의 샌들포드 공원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토끼들이 탈출하게 된 이유는 서치 앤드 마틴 주식회사가 목 좋은 이곳에 7,300평의 신식 고급 주택을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몽마르뜨 공원 토끼들의 사연과 다르면서 닮았다. 작가는 작품에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묘사를 최대한 배제한다. 그들이 주체가 된 엄중한 세계를 보여 줌으로써 인간은 워터십 다운을 오가는 일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 같다. 토끼들은 재앙이 덮쳐오는 샌들포드를 나와 목숨을 걸고 엔본강을 건너간다. 절대 한 번에 100미터 이상을 달리는 법이 없는 토끼들이 그 거친 덤불을 끈질기게 달려가면서 소망한 것은 ‘풀이 조금 있고 총을 가진 인간이 없는 곳’에서 사는 일이었다. 그들은 새 터전을 찾지만 거기에는 또 다른 삶을 살아온 토끼들이 있었고, 그들의 말로 ‘엘릴’이라고 부르는 천적들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 더없이 고요해 보이는 워터십 다운 언덕은 토끼의 눈높이로 엎드렸을 때 치열한 생존 투쟁의 장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작가가 토끼와 야생 동물의 삶을 상상해서 창작된 토끼의 언어로 대화를 설계하고 그들의 인지 범위 안에서 세계를 재구축한 판타지이지만 각 장면은 철저하게 과학적인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두었다. 작품 속에 나오는 토끼의 생태적 특성은 대부분 사실이다. 이것이 자의적인 의인화로 이루어진 다른 동물 판타지와 이 작품의 질감이 크게 다른 이유이다. 여기에 토끼의 시선과 각도로 공간을 포착하고 ‘잡목림과 시내 사이의 비탈에 자라는 황새냉이의 납작하게 펴진 잎’까지 재현해 내는 섬세함이란 스스럼없이 경탄할 정도다. 처음 책을 만났을 때 독자는 방대한 소설의 길이에 놀라지만 읽어 나가다 보면 이것이 토끼의 세계에 충분히 몰입하기 위한 적절한 분량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곧 마치 자신이 워터십 다운의 토끼 중 하나가 된 것처럼 느낀다. 언제 ‘실플레이’(먹이를 먹으러 땅으로 나가는 일)를 할까 헤아리고 위기에 봉착하면 “존! 존!(끝장이다!)”이라고 토끼어로 외치며 눈을 질끈 감는다.

하지만 자연을 배경으로 정교하게 구현된 판타지 정도였다면 이 작품을 수십 년 동안이나 그 많은 독자들이 흠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품 속 토끼들이 드러내는 성격의 스펙트럼이 인간 군상의 모습과 매서울 정도로 비슷하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장중하다. 분명히 토끼들의 대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익숙하게 보아왔던 사람들의 표정과 관계의 혼돈을 만나고 그 안에 감춰진 우리들의 현실을 목격한다. 에프라파의 족장 운드워트는 인간의 역사를 종종 파국으로 몰아붙이던 전체주의자를 닮았다. 그에 맞서 스트로베리는 ‘동물은 인간과 달라.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굴려 가며 다른 동물의 삶을 망치고 상처를 주진 않아. 동물은 존엄성과 동물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야.’라고 역설하지만 묵살당하고 만다. 스트로베리가 ‘동물성’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인간이 이상으로 삼는 ‘인간성’과 같다. 그러나 토끼들은 인간이 현재와 같은 모습이어서는 결코 그들이 원하는 인간성을 가질 수 없다고 통렬하게 단언한다. 그런가 하면 토끼들의 겨울은 중세의 겨울과도 같아서 힘들지만 재치를 발휘하면 견딜 수도 있다고, 책을 읽는 독자들 앞에 놓인 차가운 미래에 대해 희망을 안겨 주기도 한다. 모험이 종료될 때쯤 독자는 이곳이 왜 나의 세계가 아닌가 하는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 파이버처럼 ‘다정하고 친근하게 저 너머에 있는 뭔
가를 바라보는’ 친구를 갖고 싶어지고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너도밤나무잎에 실려 어느 땅속 깊은 토끼굴에서 워터십 다운의 토끼들과 함께 영원히 머무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 읽기를 좋아한다면 초등학생부터 누구나 다가갈 수 있는, 잘 읽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1978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고 2019년에 다시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 되었다지만 굳이 영화로 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워터십 다운의 정경을 그려 볼 수 있도록 풍성한 문장이 가득하다. 환상의 여정을 떠나기 전에 책을 감싸고 있는 표지의 안쪽에서 워터십 다운 일대의 지도를 살펴보는 것도 좋겠다. 토끼의 이름을 구별하기가 어려울 때는 인물 카드를 적어 책 사이에 끼우고 기록해 가면서 읽는 것도 권한다. 등장하는 토끼의 이름을 적어 놓고 그 인물의 특성이나 인상 깊은 발언을 메모하면서 읽다 보면 독서를 마칠 때쯤이면 어느새 손으로 적은 인물 카드가 빼곡하게 들어차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 어린이에게는 자연의 신비와 모험의 두근거림을 전하고, 청소년에게는 동료와 함께 성장하는 벅찬 감정을 느끼게 해 주며, 어른에게는 험난한 생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해 주는 세대를 뛰어넘는 명작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워터십 다운의 박진감 넘치는 모험에 동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