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토론 : 노동하는 인간 VS 놀이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의 즐거움과 창조성으로 이끄는 책
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
하위징아의『호모 루덴스』는 방대한 역사 연구를 통해 인간의 원형을 '놀이’에서 찾아낸 역작이다. 그러나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무척이나 어렵다. 노명우의『호모 루덴스, 놀이하는 인간을 꿈꾸다』는『호모 루덴스』를 사례 중심으로 쉽게 풀이함으로써 독자를 핵심 주제 의식으로 친절하게 이끈다. 나아가 원저의 한계를 넘어 하위징아의 주제 의식을 오늘날 우리 사회로 확장했는데, 이것은 이 책만의 큰 장점이다. 오늘날 놀이는 기업이 돈벌이를 위해 판매하는 판박이 상품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놀이 정신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예리한 사회학적 분석을 통해 디지털 기술이 몰고 올 변화에 주목하며, 놀이와 창조가 하나 되는 미래를 꿈꾸자고 제안한다. 행복한 미래를 상상한다면, 우리는 이미 호모 루덴스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그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지 않은가?
 
 
 
사회자 인간의 특징은 호모 파베르(노동하는 인간)일까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일까요? 호모 파베르라는 규정은 인간의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속성을 부각시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이 점을 별로 의심치 않죠. 대학과 전공을 선택할 때 ‘거기 가면 재미있을 것 같아서’라는 이유보다 ‘얼마나 돈을 잘 벌 수 있느냐’를 기준으로 삼는 것도 그런 맥락이겠지요.
그런데 여기 “인간의 본성은 잘 노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나아가 놀이가 문명 창조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하고, 제대로 놀 줄 모르는 현대 사회는 위기에 놓여 있다고 비판합니다. 오늘은 인간의 특성을 서로 다르게 보는 두 분을 모셔서 토론을 벌입니다. 호모 파베르 씨와 호모 루덴스 씨입니다.
 

호모 파베르 예, 호모 파베르올시다. 인간이란 뭐냐? 쓸모 있는 것을 만드는 존재이지요. 생활을 편리하게 해 주는 옷, 자동차, 집 등이 바로 쓸모 있는 것이죠. 이런 것들을 어떻게 만드나요? 꿈을 꾸고 생각만 한다고 되지 않지요. 노동을 해서 생각을 현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로 수치를 재고 계산기를 두드려 비용을 알아내야지요. 이처럼 합리적인 방식으로 유용한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동물과는 다른 사람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면 이는 당연한 사실이지요.
 
 
호모 루덴스 그렇지만 당연하게 생각되는 그런 계산적인 태도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은 뒤에야 보편화된 것입니다. 그럼 그전에는 어땠는가? 고대인들이 콜로세움을 지은 일이나 중세의 기사도 문화를 보세요. 그걸 계산적인 태도에 따른 것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당장 필요가 없는 것이라도 명예를 위해, 재미를 위해 추구하는 본성이 인간에게 있어요. 즉 ‘놀이’라는 본성입니다. 네덜란드의 하위징아(1872~1945)라는 학자가 역사를 연구하여 밝혔듯이 문명은 놀이하는 인간의 작품이지요.
 
 
호모 파베르 뭐, 문명이 놀다 보니 만들어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사회자 어이쿠, 이거 시작부터 분위기가 격해지는군요. 하나씩 짚어 가죠. 호모 파베르 씨, 문명 발달의 원동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호모 파베르 참 나, 저도 놀이가 인간 본성의 하나라고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언제나 놀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살아가려면 삶에 도움이 되는 물건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만들기 위해서는 투자 대비 최대 효용을 고려해야 하고요. 그 과정에서 혁신이 이뤄지고 생산이 늘어 문명도 발달하지요.
 
 
호모 루덴스 유용한 물건을 많이 만들기만 하면 좋은 걸까요? 그런 생각은 대량 생산이 무조건 좋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나아가 식민지 정복과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부추겨 오히려 문명을 파괴하고 말았지요.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와 로마의 안토니우스가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다.
고대에는 정치도 놀이의 성격을 지녔다. 그림은 조반니 티에폴로가 그린 <클레오파트라의 연회>다.
 
 
사회자 한번 정리를 해 보죠. 호모 파베르 씨는 문명 발달의 동력이 합리적인 노동에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데 호모루덴스 씨는 그런 시각이 오히려 문화를 쇠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하는 것이고요. 그렇다면 호모 루덴스 씨는 어떤 근거로 놀이하는 인간이 문명을 낳았다고 주장하십니까?
 
 
호모 루덴스 인간이 당장 시급하지 않은 욕구를 추구한 덕분에 문명이 발달했던 것이지요. 인도의 타지마할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결국 무덤입니다만, 단지 무덤의 기능만을 위해 그토록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을 지을 이유가 있을까요? 옷은 몸을 가리기만 해도 되는데 어째서 인간은 세련되고 화려한 ‘패션’을 원하는 걸까요? 또 배를 채우기만 하려면 그 다채로운 요리법이 생겨날 필요가 없죠. 문명의 핵심인 학문과 예술을 봅시다. 오늘날 공부라고 하면 책상에서 열심히 문제집을 푸는 학생이 떠오르죠. 하지만 과거의 배움은 기본적으로 수수께끼 놀이였어요.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던졌지요.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이 같은 질문을 주고받음으로써 인간과 우주에 대한 지혜를 키워 간 겁니다. 중세 대학의 수업도 기본적으로 이런 문답과 토론이었고요. 즉 학문은 놀이 정신에서 나온 것이죠. 예술도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향한 놀이입니다. 이들은 진정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먹고사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지요. 호모 파베르 씨의 주장처럼 쓸모 있는 물건만 만들어서는 수준 높은 문화가 발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유용성을 따지는 태도보다는 놀이 자체를 즐기려는 욕구가 문명을 만드는 힘이지요.
 
 
호모 파베르 흥, 하지만 문명의 또 다른 요소는 질서와 권력이외다. 설마 사회가 놀이로 유지됐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겠죠?
 
 
호모 루덴스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데도 놀이의 요소가 있습니다. 고대에는 사람들 사이에 분쟁이 생기면 주사위를 던지거나 제비를 뽑아 해결했어요. 고대인들은 정의란 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놀이의 승부는 신의 선택을 보여 준다고 믿었죠. 중세 사회를 유지한 관습이던 기사도도 사실 명예를 다투는 놀이였습니다. 앞을 다투어 외적과 싸우고 약자를 도우려했던 것은 명예 때문이었죠. 오늘날 경제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힘센 나라가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요?
 
 
호모 파베르 좋소. 그러나 호모 루덴스 씨는 고대와 중세 시대의 예를 들고 있어요. 그때는 온종일 놀 수 있는 특권 신분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동만 해야 하는 노예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요. 그러나 오늘날은 사회가 변했습니다.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 노동을 해야 하지요. 놀이는 그 다음에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놀이 정신이 고귀하다 해도, 오늘날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지 않겠소?
 
 
호모 루덴스 좋은 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뭔가 다른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는 누구나 입장료만 내면 놀이공원에서 손쉽게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렇지만 놀이는 놀이 산업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로 전락했다.
 
 
호모 파베르 제가 방법을 알려 드리지요. 놀이도 경제적 합리성의 관점으로 보면 됩니다. 바로 놀이 산업이지요! 일상에 지친 가족들은 놀이 공원으로 가면 됩니다.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스트레스를 확 날려 버릴 수 있어요. 그뿐인가요? 어른을 위해서는 레저 산업도 준비되어 있지요. 이것이 호모 파베르식 놀이 문화란 말씀이에요. 하하, 문제는 해결되었군요.
 
 
호모 루덴스 하지만 그게 진정한 놀이일까요? 그건 시장이 제공하는 상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지요. 게다가 놀이 공원의 아르바이트생처럼 남들의 놀이를 위해 자신은 땀 흘려 일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모순이고요. 저는 디지털 기술과 함께 떠오르는 새로운 놀이 문화에 주목합니다. 놀이와 창조가 하나가 되는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고 있으니까요.
 
 
사회자 네, 흥미로운 토론이었습니다. 오늘 논의한 쟁점들이 쉽사리 풀릴 문제는 아니지요. 그러나 호모 파베르가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 호모 루덴스가 등장했다는 것은 분명 시대의 변화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리에 함께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 · 오준호 (번역가)
 
 
1318북리뷰 2011년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