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의 나라, 그 진실한 세상 : 조혜정

제2회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독서감상문대회
대학일반부 대상 수상작

 
 
마치 열두살 시절로 되돌아간 느낌이었다. 물질의 결핍도 내 마음 속 가득찬 꿈을 앗을 수 없어 , 그것으로 얼굴 가득 홍조를 띠고 학교로 통하던 그 작은 산을 마구 내달리던 그때로. "당신들 개심해야 해. 진심으로 마음을 고치는 거야. 이제 곧 사람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 없게 된다구. 살아갈 수 없게 된단 말야. "당신들 만일 개심하지 않으면, 잡아먹힌다구. 아무리 잔뜩잔뜩 낳더라도 진실한 인간한테 멸망당한단 말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과함께 한 20여일 동안 내 머릿속엔 줄곧 한 광인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사람을 먹는 인간을 향한 광인의 부르짖음이 이토록 실감나게 들린 적은 없었다. 사람을 먹는 인간이라...... 그들을 멸망시킬 진실한 인간은 또 누군가. 『광인 일기』 를 읽던 열일곱 소년시절엔 나름대로 루쉽의 의도를 캐내려 골똘히 창을 보기도 했었 다. 그런데 벽초의 일곱 호걸들과 밤낮을 같이하면서, 나는 사람을 먹는 인간과 진실한 인간이라는 괄호 안에 '민중의 살 을 갉아먹는 뭇 양반'이란 표현과, 괴테의 말마따나 '억누를 대로 억눌러온 조용한 분노를 가지고 진격하는 백성들'이란 말을 자연스레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란 말 옆에 일곱 의형제의 이름을 붙여보기도 했었다. 도둑과 진실 한 인간 사이엔 아무런 연관성이 없을 법 하건만,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소설 『임꺽정』을 접하기 전, 나는 커다란 책가방을 메고, 자갈 깔린 산허리를 오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길은 험 한데 가야할 학교는 뵈지않고 , 험한 이 길은 끝이 없을 것 같은 답답함의 연속, 내 안에 가득 찬 이상에 대한 열망만 믿 고서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고, 그야말로 주경야독하면서 재수시절을 보냈건만,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나는 기 계음으로내 불합격 소식을 전해 듣고서 한동안 멍한 마음으로 앉아 있어야했다. 그러던 중 벽초의 목소리와 만날 수 있 었다. 오래도록 나를 붙드는 그 끈끈한 생명력 그득한 문체에 나는 전신에 힘이 뻗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것과 밤낮 을 같이하면서 비로소 나는 자갈 깔린 산허리를 다 올라 산정을 향한 잔디 덮인 오솔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임꺽정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본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갖은 설음을 다 겪고 자란 그는 남다른 능력을 지닌 사 람이었다. 타고난 장사에, 젊어서 익힌 검술까지 , 그는 능히 지배층의 표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영웅적 기질 이 다분한 인물이긴 했지만 ,그에 따른 결점도 지니고 있었다. 능력자이긴 하였으나 권위적이었고 , 시대와 타협하지 않았으나 권력을 얻자 시대의 향락에 젖는 모순을 보였으며, 가난한 자의 것을 일부러 빼앗지는 않았지만 돕지는 않았으 니 말이다. 책을 읽기전, 홍길동과 그를 동일시하면서 환상마저 품고 있던 터라 적지않은 실망감을 느끼기도 했는데, 특히 조강지처를 무시한 채 네 명의 첩을 두고, 첩들을 구하려 죄 없는 수많은 양민들의 집을 불지르고 그 혼란통에 구해오 자는 서림의 의견을 좇으려 했던 부분이나, 자기에게 몇 마디 조소 어린 항의를 한 황천왕동이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부분 등은 실망감을 극에 달하게 하였었다. 그러나 내게도 문제가 있었던 게, 결코 조선시대 사람들의 정서와 눈으로 책을 읽지 않다는 것이었다. 순전히 20세기적 사고만으로, 그 시대 사람들 삶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서 책을 읽으려 덤볐으니 실망감이 쌓이는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또 영웅 임꺽정이 어찌하여 좀더 그럴듯한 의적이 되지 못하였나 하는 것 으로 마음 쓰일 때 , 문득 소흥에게 자신을 이야기하며 시대를 한하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세상사람이 임금이 다 나보다 잘났다면 나를 멸시 천대하더래두 당연한 일루 여기구 받겠네. 그렇지만 내가 사십 평생 에 임금으로 쳐다보이는 사람은 몇 못봤네...... 세상사람이 모두 내 눈에 깔보이는데 깔보이는 사람들에게 멸시 천대를 받 으니 어째 분하지 않겠나. 내가 도둑눔이 되구 싶어 된 것을 아니지만, 도둑눔 된 것을 조금두 뉘우치지 않네, 세상사람에 게 만분의 일이라두 분풀이를할 수 있구 또 세상사람이 범접못 할 내 세상이 따루 있네......" 어쩌면 소설적 허구와 신비를 가미한 홍길동이란 인물과, 사회주의 사상의 기조 위에 사실적이고 인간적이게 형상화한 임꺽정이란 인물을 동일시했던 나의 무지함부터 탓할 일이었다. 나는 비로소 흥분을 가라앉히고 근본적 모순점을 따라 임꺽정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시대에 대한 울분과 피해의식으로 가득 찼던 임꺽정, 그는 분명 올바른 삶을 살지는 않 았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시대 소개 그것을 필연일 수 부지런하였에 없었고 , 최후의 결단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 리고 그는 그 필연성에 좇아 참으로 굳건하게 열심히 생을 살아갔던 것이다. 산정에 다다르자 길게 엎드린 은회색의 바위가 보인다. 나는 그 눈비 맞아 더욱 단단한 찬 바위 위에 걸터 앉아, 소나 무 잔가지 사이로 비치는 챙챙한 하늘을 바라본다. 오래 전부터 간직해온 이상, 그것은 하늘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삼 수를 눈앞에둔 시점에서 나는 자신감을 잃고 있었다. 재시도의 두려움, 다음 해 역시 지금과 같은 모습일지 모를다는 섣 부른 상상과 그에 따른 불안감...... 그때 들린 커다른 함성이 있었다. 어쩌면 심약해진 나를 향해 내지르는 것 같은 , 산 을 뒤흔드는 그 큰 함성에 나는 두 발 가득 힘을 주고 일어섰다. 그리고 함성의 주술에 걸린 듯, 내리막길을 따라 힘있 게 발을 옮겼다. 

임꺽정, 이봉학, 박유복, 배돌석, 황천황동이, 곽오주, 길막봉이. 이들은 벽초의 능란한 붓 끝에서, 처음부터 일관된 모습으 로 포효하듯 내게 다가왔다. 소설의 분량이 방대해지다보면, 처음 설정한 인물의 성격이 장수를 더해갈수록 그 빛이 바 래고, 혹은 처음과 판이한 모습으로 변하곤 하는 것을 가끔 보아왔는데, 놀랍게도 저 일곱 호걸들의 성격, 행동 등은 시간 이가도 변함이 없었고 또 벽초의 해학적이고 토속적인 우리말과 더불어 묘사된 그들의 행동 모습들이나 한사람, 한사람 뚜렷한 개성을 입고 입체감 있게 살아움직여, 이야기의 전개 못지않는 재미를 가득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입김까지 생 생한 일곱 대장부들에 의해 나의 활기는 되살아났고, 그 힘을 통해 새롭게 일어서서 새로운 눈으로 그들의 시대와 그들 의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시작은 한이었고 , 한은 새로운 그들만의 세계를 열게 하였다. 그들만의 세 계, 그것을 배워먹지 못한 무식한 자들의 그저 그런 공간쯤으로 치부하고 비난한다면, 그는 근본적인 모순을 간과한 실수 를 범했다 해도 잘못된 판단은 아니리라. 임꺽정과 그 여섯 형제들의 진실하지 못한 듯한 삶은, 근원의 문제가 치유되지 않는 한 언제까지 진실된 삶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얼핏 패배한 듯한 그들의 생애 역시, 카프카의 말대로 "싸워 보려 했기 때문에 패배를 당한것"이 아니었던가. 종국에 패자가 되더라도 싸워보려 했다는 것이 시대를 바로잡는데 얼마 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1997년 벽두부터 우리에게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개심하 고 개심하라고, 마치 미친 사람처럼 부르짖어도, 우리들 머리 위에서 판을 차리고 둘어앉은 그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 려 한쪽 눈을 내리깔 뿐이었다. 그들이 쥐고 흔들어 굴곡을 이루며 흘러가는 역사 앞에서 ,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진실 한 삶이겠는가. 비판과 저항 없이 , 한숨만 뿜으며 살아가야하는가. 시대에 충실하고 개인의 역사에 충실하기 위해, 개심 하지 않은 권력자들에 저항하며 또 다른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여 일어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근원의 모순이 해 결되지 않는 한 그 세계는 확산되어 개개의 사람들은 무리를 이룰 것이고, 그들에 의해 올바른 시대를 맞은 우리의 후배 들은, 그 세계와 사람들을 진실했다고 말할 것이다. 

겨울의 흔적이 남은 메마른 숲 멀리에서 잔잔한 봄내음이 건너오고 있음을 느낀다. 마른 풀냄새 같기도 한 바람결, 그 속에 책에서 본 먼 옛날의 우리들 할머니, 할아버지의 조용한 삶이 어려 있는 듯하다. 이야기듣기를 즐겨하고, 낯 모르는 과객도 흔쾌히 맞아, 다만 거친 밤 한공기라도 내어다주던 심성고운 우리네 조상님들, 단천령의 피리소리, 그 소리 하나에 울고 웃는, 한이 많고 감성이 여리던, 가난하던 그분들. "선선하거든 방으로 들어가지."달이 아까우니 잘 때나 들어가지," 지금은 듣기도 힘든, 조용조용 아름답던 대화를 즐겨 나누던, 자연의 일부인 삶을 살았던 그분들의 향기가, 20세기를 사 는 이 젊은이에게 절절한 감화로 다가왔다. 일곱 의형제가 건넨 활력과 옛날의 우리 선조들의 잔잔한 일상이 준 감화로 나는 크게 자란 기분이었다. 이제 내리막 길도 마저 걸어 집에 도착한 나는, 되 찾은 삶을 위에서 가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치고 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 은 하나도없다"지 않은가. 광인의 낙인이 찍히면서까지 또 다른 세계의 구축을 위해 싸우더라도, 진실을 회피한 채 쉬운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라는 의 역사에 충실한 채 살고 싶다. 때때로 자신감을 잃고 심약해진 나를 발견할 때 ,나는 다시 한 번 이 책을 펴고 그들을 만나서, 그들이 건네는 무언의 힘을 한껏 호흡하리라.